여러 곳에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 살아있을 때,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도준이 남기고 간 심장, 신장, 각막, 그리고 그가 설계한 창문들.

박수현(기증자 아내) · 이지안(심장) · 최서연(신장, 9세) · 윤재현(각막) — 강도준이 떠나고 남은 사람들.


1장 — 멈춤

서류는 A4 한 장이었다. 세 곳에 서명란이 있었고, 두 곳에는 이미 의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칸이 비어 있었다.

박수현은 볼펜을 받았다. 진한 파란색 잉크를 쓰는 펜이었다. 나중에 그 색이 기억날 줄은 몰랐다.

형광등 불빛이 서류 위에 하얗게 고여 있었다. 복도에서 카트 소리가 지나갔다.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소리였다.

도준은 아직 저쪽 방에 있었다.

“준비되셨으면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이름표를 달고 있었는데 수현은 보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수현은 펜 끝을 칸에 댔다. 그리고 멈췄다.

펜 끝이 종이에 닿은 상태로, 잉크가 아주 조금 번졌다. 수현은 그것을 봤다. 아주 작은 점.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점이 점점 번졌다. 둥글게. 아주 천천히.

도준이 동의했겠는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썼다. 박수현, 세 글자.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복도로 나왔을 것이다. 누군가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기억에 없다. 번진 잉크만 기억난다. 점이 아니라 멈춤이었다는 것.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백사십일이 지났다.

수현은 지금 마포구의 작은 골목 안에 있다. 도준이 마지막으로 설계한 건물이다. 카페가 들어와 있다. 준공 파티를 할 때 도준이 왔었는지 안 왔었는지 — 기억이 흐릿하다. 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들었다. 도준이 완성된 건물을 보러 온 적이 없었다고. 설계 사무소 직원이 말했다. 만드는 동안이 전부라고 했었대요, 라고.

수현은 그 말이 처음에는 이상했다. 지금도 조금 이상하다. 그런데 이제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창문 쪽 자리가 비어 있었다. 수현은 거기 앉았다. 의식적으로 고른 게 아니었다. 앉고 나서 여기가 창문 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따뜻했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이상했다 — 창문이 크면 안이 훤히 보여야 하는데, 어떻게 굴절되는지 내부가 따뜻하게 어두웠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가방에서 작은 다이어리를 꺼냈다. 도준의 것이었다. 정리하다가 나왔다. 버리지 못했다.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가지고 다녔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봤다. 검정 표지. 아무것도 없는 표지. 도준은 표지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그게 도준이었다.

창문 너머 골목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수현은 다이어리를 열지 않았다. 커피가 나왔다.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이백사십일. 그 사이에 많은 사람이 말을 했다. 괜찮냐고. 잘 지내냐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고. 수현은 응, 이라고 했다. 네, 라고도 했다. 그 말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도준의 다이어리는 아직 닫혀 있다.

빛이 테이블 위로 조금 내려왔다. 오후 초입의 빛이었다. 수현은 그것을 보면서 도준이 이 각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몰랐으니까. 그냥 따뜻하다고만 생각했다.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2장

현관에 도준의 신발이 있었다.

스니커즈. 뒤축이 조금 눌려 있는 것. 도준은 신발을 신고 벗을 때 항상 손을 쓰지 않았다. 수현이 여러 번 말했다. 그래도 그랬다.

수현은 그 신발 앞에서 멈췄다.

들어가야 했다. 어딘가에 짐을 내려야 했다. 며칠 치 옷이 든 작은 가방이 손에 있었다. 병원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신발을 옮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있었다. 옮기지 않았다.

그냥 그 옆에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 나란히.


도준의 사무소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 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세 개 있었다. 직원이 말했다. 김 소장님, 이라고 불렀다. 소장이 김도준이었다는 것을 수현은 새삼스럽게 들었다. 도준의 직함이었는데, 도준을 소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도준이었으니까.

직원은 천천히 설명했다. 마포 카페 건물이 거의 완성 단계라고. 준공 신청이 다음 주라고. 나머지 두 개는 아직 시작 전 단계라서 의뢰인과 상의가 필요하다고.

수현은 들으면서 메모를 했다. 손이 움직였다. 수현도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마포 카페. 마포 카페. 두 번 썼다.

준공 됩니다, 라고 직원이 말했다. 그 건물은 완성됩니다. 소장님이 마지막으로 작업하신 건물이에요.

수현은 응, 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메모를 봤다. 마포 카페. 마포 카페. 그 옆에 전화번호. 직원의 이름. 다음 주 준공.

도준은 그 건물을 완성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알았을까. 수현은 모른다. 마지막으로 갔을 때가 언제였는지도.


한 달이 지났다. 두 달이 지났다.

수현은 그 건물에 가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들 것 같지도 않았다.

도준의 신발은 아직 현관에 있었다.

한번은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 신발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닫았다. 신발은 그 자리에 있었다.

도준이 동의했겠는가, 하는 생각. 그때 끝까지 가지 않았던 그 생각이 이상한 때에 왔다. 설거지를 하다가. 자기 전에. 회사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때마다 수현은 다른 생각을 했다. 장을 봐야 한다. 청구서가 왔다. 내일 뭘 입을까.

그 질문은 끝까지 가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갈 즈음, 도준의 사무소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었다. 나머지 두 프로젝트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의뢰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수현은 전화기를 들고 창문을 봤다.

저녁이었다. 가로등이 막 켜졌다. 나뭇잎이 아직 몇 개 붙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라고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다음 날도 생각했다. 그 다음 날도.

도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준이 없으니까. 수현이 결정해야 했다.

결국 의뢰인들에게 직접 연락했다. 다른 사무소를 소개했다. 도준이 남긴 스케치와 메모를 넘겼다.

그 스케치들을 다시 보지 않았다. 넘기기 전에 사진을 찍어두기는 했다. 지금도 찍어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 열어보지 않았다.


현관의 신발은 겨울이 올 때도 거기 있었다.

누가 물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 신발을 보셨을 것이다.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수현도 아무 말을 안 했다.

도준의 신발이 거기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느끼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는 정말로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신발이었다. 거기 있는 신발.


3장

그날 왜 거기를 지나갔는지 나중에 생각해봤는데, 이유가 없었다.

퇴근길이었다. 버스를 탔는데, 평소와 다른 번호를 탔다. 실수는 아니었다. 특별히 그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탔다.

마포에서 내렸다. 추웠다. 저녁 다섯 시였는데 이미 어두웠다.


수현은 가방을 어깨에 조였다.

골목이 있었다. 저쪽 편에. 도준이 말한 적 있었다. 주택가 뒤쪽이라서 조용한 자리라고. 건물이 작아서 좋다고. 수현은 그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건물이 작은 게 왜 좋은 건지.

골목으로 들어갔다.

포장이 안 된 바닥이었다. 돌이 몇 개 튀어나와 있었다. 발끝이 걸렸다. 수현은 멈추지 않았다.

건물은 골목 끝에 있었다.


처음에는 뭔가 이상했다.

건물이 작은 건 알고 있었다. 사진도 있었다. 직원이 사무소에 왔을 때 건물 사진을 보여줬다. 준공 신청 서류에도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 달랐다.

사진에서는 건물이었다. 눈앞에는 건물이 아니었다. 아니, 건물이긴 한데. 도준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수현은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


창문이 컸다.

도준은 창문이 큰 공간을 좋아했다. 집에서도 커튼을 잘 치지 않았다. 낮에 빛이 들어와야 한다고. 그게 무슨 대단한 이유가 되냐고 수현이 물은 적 있었다. 도준은 웃었다.

저 창문도 도준이 낸 것이었다.

겨울 저녁 빛이 유리에 반사되고 있었다. 안이 보였다.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열어 놓은 사람. 컵을 들고 창밖을 보는 사람. 마주 앉은 두 사람.

수현은 밖에 서 있었다.


도준이 이 창문의 각도를 계산했다는 것을.

오후 몇 시에 어떤 방향에서 빛이 들어와야 하는지. 어느 계절에 어떤 길이의 그림자가 생기는지. 수현은 몰랐다.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도준이 설계할 때 무슨 계산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다. 건축사니까. 그런 걸 한다는 것을.

근데 저 창문이 — 도준의 계산이었다는 것이 — 보이게 됐다.

도준이 저기 서서 계산을 했겠다. 어디쯤 서서, 무슨 표정으로.


바람이 왔다.

목이 찼다. 수현은 코트 단추를 하나 더 잠갔다.

안으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있었다. 안 들어갔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골목을 다시 걸어 나왔다. 돌이 튀어나온 곳을 이번엔 알고 피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평소에 타는 번호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 밖에 어둠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현관에 신발이 있었다.

수현은 자신의 신발을 벗고, 그 옆에 놓았다.

도준이 저 창문의 각도를 계산했겠다. 그 생각이 아직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빛이 들어와야 하는지. 어느 계절에 어떤 그림자가 생기는지. 오늘 저녁처럼, 유리에 반사되어 골목 바닥까지 빛이 내려오는 날을 — 계산했거나, 계산하지 않았거나.

수현은 몰랐다. 그것도 모르는 것들 중 하나였다.


4장

도준의 옷이 옷장 한쪽에 있었다.

수현이 처음부터 그쪽을 안 건 아니었다. 정리하다가. 셔츠 두 벌, 바지 한 벌, 재킷 한 벌. 수현의 것들과 같은 공간 안에 있었다.

재킷을 꺼냈다. 어깨 솔기가 살짝 뜯겨 있었다. 오래된 것이었다. 도준이 자주 입던 것.


세탁소는 집에서 걸어서 오 분이었다.

수현은 재킷을 안고 나갔다. 접어서 안으면 됐는데, 접지 않았다. 옷걸이에서 꺼낸 그대로였다.

바람이 조금 있었다. 낮인데 빛이 낮았다. 가을이 거의 끝에 와 있었다.


세탁소 주인은 물을 끓이고 있었다. 주전자 소리가 났다.

수현이 문을 열었을 때 주인이 돌아봤다. 인사를 했다. 수현도 했다.

재킷을 카운터에 올렸다.

주인이 재킷을 한 번 살폈다. 안감을 확인하고, 어깨 부분을 살피고. 솔기가 뜯긴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수선도 같이 할까요?”

수현은 잠깐 있다가 말했다. “아니요.”


주인이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수현은 기다렸다.

번호표를 받았다. 초록 플라스틱이었다. 숫자가 인쇄된.

“나흘 뒤에 오시면 됩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왔다.

번호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갑을 꺼냈다. 카드 뒤쪽에 넣었다.

바람이 왔다. 가로수에서 잎 두 장이 떨어졌다.

수현은 걸었다.


집에 돌아오니 옷장이 열려 있었다. 나올 때 닫지 않았다.

도준의 옷이 있던 쪽에 빈 공간이 하나 생겼다. 재킷이 있던 자리였다.

수현은 옷장을 닫지 않았다.

잠깐 서 있었다.

그냥 서 있었다.


번호표가 지갑 안에 있었다. 카드 뒤에.

수현은 옷장을 닫았다.


5장 — 이유 없이

11월이었다. 이식 수술이 9월 말이었으니까 6주쯤 지났을 때.

이지안은 버스를 한 정거장 일찍 내렸다. 그냥 내리고 싶었다. 이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는 느낌이 발보다 먼저였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혼자 버스를 탄 것도 처음이었다. 딸이 태워주겠다고 했다. 이지안은 괜찮다고 했다. 딸은 표정을 고쳤고, 이지안은 그 고쳐진 표정을 보면서 괜찮다고 다시 말했다. 버스를 탔다. 버스 창문 밖으로 11월 골목들이 지나갔다. 이지안은 그것을 보면서, 세상이 여전히 움직인다는 것을 — 이상하게 낯설게 — 알았다.

걷기 시작했을 때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도 가슴은 뛴다. 그런데 지금은 들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이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감각. 의사는 거부반응이 없으면 곧 자기 몸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했다. 이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도 그 경계를 잘 모르겠다. 이 박동이 자기 것인지, 아직 낯선 것인지. 어쩌면 그 구분이 처음부터 없는 것인지.


골목 안에 카페가 있었다. 지나치려다 멈췄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간판이 작았고, 메뉴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들어가고 싶었다.

창문이 컸다. 그게 전부였다.

길에서 안을 보니 빛이 이상했다. 창문이 크면 안이 훤해야 하는데, 거기는 빛이 어떻게 굴절되는지 모르지만 내부가 따뜻하게 어두웠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들어가고 싶었다.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왔다. 커피 냄새가 났다.

자리를 고를 때,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 가장 가까운 자리. 이것도 왜인지 몰랐다. 앉고 싶은 자리가 먼저 있었고, 이유는 나중 문제였다.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이지안은 커피를 가리켰다.

손이 먼저였다. 입보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음료 목록 중 커피를 가장 마지막에 골랐다. 그런데 손이 먼저 커피를 가리켰다. 직원이 어떤 종류로 드릴까요, 했고 이지안은 뭐가 있는지를 보면서, 자기가 왜 커피를 시켰는지를 동시에 생각했다. 그냥, 라는 대답이 가장 정확했다. 그냥 커피.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이지안은 창문을 봤다.

11월 골목. 나뭇잎이 거의 없었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오후 빛이 비스듬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빛이 카페 창문을 통해 들어오면서 탁자 위에 납작하게 깔렸다. 이지안은 자기 손을 봤다. 빛 속에 있었다. 손이 따뜻했다.


가슴이 뛰었다. 커피를 마시기 전이었는데 뛰었다.

강하게가 아니었다. 조금 빠르게. 이지안은 그것을 느끼면서 컵을 들지 않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이지안은 그것을 봤다. 가슴이 한 번 더 뛰었다.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반응이라기보다는 — 인식 같은 것. 저기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자전거가 있다는 것을, 이 심장이 먼저 알았다. 그런 느낌.

이 심장이 무엇을 인식하는지 이지안은 모른다.

아메리카노를 처음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었다. 원래 쓴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 쓴게 나쁘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쓰다. 그게 다였다.


카페 안이 조용했다. 주문하는 소리가 가끔 들렸고, 커피 기계 소리가 잠깐 났다가 그쳤다. 이지안은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소리들이 꽤 선명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이 정도로 들렸나. 모르겠다. 비교할 것이 없었다.

창문으로 오후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지안은 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따뜻했다. 손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 순간이 왜 좋은지를 생각했다. 좋다는 느낌이 먼저 있었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좋았다.

밖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이었다. 이지안은 소리가 지나가는 방향을 눈으로 쫓았다. 소리는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조용하게.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이지안은 컵을 내려놓고 창문을 한 번 더 봤다.

오후 빛이 이미 낮아져 있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각도가 달라졌다. 이지안은 빛이 어디에서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보면서 — 이 창문을 누가 이 방향으로, 이 크기로 만들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빛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그날을 생각했다.

왜 그 정거장에서 내렸는지. 왜 그 카페에 들어갔는지. 왜 창문 쪽에 앉았는지. 왜 커피를 시켰는지.

답이 없었다.

이지안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가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6장 — 잘 자

열두 살짜리 오빠가 숙제 때문에 계속 지우개를 썼다. 지우는 소리가 났다. 지우개 냄새가 조금 났다.

겨울이었다. 12월.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서연은 배를 만졌다.

등쪽 조금 위. 엄마가 신장이 거기 있다고 했다. 따뜻했다. 겨울인데 따뜻했다. 서연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가 —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지우가 물어봤다. 수술 자국 있어?

서연은 옷을 살짝 올려 옆구리를 보여줬다. 지우가 작은 선을 봤다. 진짜다, 했다. 서연은 응, 했다.


밥 먹을 때 서연은 국물을 두 번 더 떴다. 엄마가 오늘 많이 먹네, 했다. 서연은 그냥요, 했다. 배가 특별히 더 고팠던 게 아니었다. 따뜻한 게 좋았다. 국물이 몸 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저씨도 국 좋아했을까.

오빠가 숙제 공책을 덮었다. 오늘 다 했어, 하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를 닦으면서 서연은 거울을 봤다. 칫솔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거울 속 서연도 똑같이 움직였다. 서연은 입을 크게 벌리고 안쪽 이를 닦으면서, 신장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몸 안을 잠깐 생각해봤다. 잘 모르겠지만 거기 있다는 것은 알았다.


불을 끄기 전에 서연은 이불 속에서 배를 한 번 만졌다.

따뜻했다.

잘 자, 했다. 속으로. 신장한테.

그다음에 — 아저씨도 잘 자, 했다.

아저씨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엄마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아빠가 그 아저씨는 많이 아팠다고 했다. 서연은 그러면 지금 병원에 있냐고 물었다. 아빠가 잠깐 있다가 — 이제는 아프지 않아, 라고 했다.

서연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완전히는 몰랐다. 이제 다 나은 거? 라고 했더니 아빠가 그래, 했다. 서연은 그러면 어딘가에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서연은 눈을 감기 전에 한 번 더 했다. 잘 자, 아저씨.

서연은 이불을 턱까지 당겼다.

몸이 따뜻했다.


7장 — 눈꺼풀

붕대를 풀 때 간호사가 말했다. 천천히 뜨세요.

윤재현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귀 뒤에서 테이프가 떨어졌다. 거즈가 하나씩 떼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눈꺼풀 위로 지나갔다.

왼쪽부터였다. 마지막 거즈가 떨어지자 빛이 들어왔다. 형광등의 흰 빛이었다. 3년 만의 빛이었다. 윤재현은 그것이 밝다는 감각이라고 생각했는데 — 아니었다. 아프다는 감각이었다.

눈물이 났다. 빛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몰랐다.

오른쪽도 풀렸다. 두 눈으로 보니 세상이 흔들렸다.


아들이 서 있었다. 그 옆에 작은 아이가 있었다. 손자였다. 민호. 세 살. 민호가 태어났을 때 윤재현은 이미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민호의 얼굴을 처음 봤다.

둥글었다. 볼이 두툼했고, 눈이 작았다. 3년을 손으로만 알던 얼굴이었다. 그 손의 지도와 지금 눈앞의 얼굴이 겹쳐지지 않았다. 손이 알던 민호와 눈이 보는 민호가 달랐다.

민호가 올려다봤다. 할아버지, 눈 빨개.

윤재현은 웃었다. 웃으면서 다시 눈물이 났다.


병실에 가족들이 있는 동안 윤재현은 창문을 오래 보지 않았다. 다들 말을 걸었고, 윤재현은 대답했다. 잘 보여요? 응. 많이 아파요? 아니. 밥은요? 좀 이따 먹을게.

민호는 아들 뒤에 숨었다가 나왔다가 했다. 할아버지 눈이 빨갛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한 것 같았다.

윤재현은 민호를 볼 때마다 손의 지도를 생각했다. 세 살 적에 안아봤던 것. 머리 뒤가 둥글었고, 귀가 작았다. 그때 귀 안쪽에 손가락을 넣으면 안 된다고 며느리가 말렸다. 가만, 그냥 냄새만 맡아도 돼요, 아버님. 갓난아이 냄새를 맡으면서 눈은 이미 흐릿했다.

지금 그 아이가 서 있었다. 눈 빨개, 하면서.


가족들이 돌아갔다. 저녁이 됐다. 병실에 다른 환자 두 명이 있었지만 조용했다.

윤재현은 창문을 봤다.

저녁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뭇가지였다. 잎이 없는 가지. 가지 사이로 하늘. 12월이었다.

나뭇가지를 보면서 윤재현은 생각했다 — 3년 동안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그냥 어두웠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보인다.

이 눈은 누군가의 것이었다.

윤재현은 그 생각이 들었을 때 한 번 멈췄다. 병원에서 설명을 들었다. 기증자가 있다는 것. 뇌사 판정을 받은 사람의 각막이라는 것. 이름은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 눈은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 사람은 이 나뭇가지를 봤을 것이다. 12월의 잎 없는 가지를. 가지 사이 하늘을.

이 각막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뭇가지를 보면서 — 처음 보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재현은 눈을 감았다.

어둠이었다.

눈을 떴다.

빛이었다.

두 개의 세계 사이에 경계가 있었다. 그 경계가 눈꺼풀이었다. 감으면 어둠. 뜨면 빛. 그것뿐인데 — 그 단순한 것이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민호가 할아버지 눈 빨개, 했을 때 윤재현은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슬픈 것은 아니었다. 기쁜 것도 정확히는 아니었다.

창밖의 나뭇가지가 조금 흔들렸다. 바람이었다.

윤재현은 그것을 봤다.


8장

달래가 세 단 놓여 있었다.

비닐로 묶어 놓은 것이었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수현은 그것들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집으려고 했다.

그 찰나에 — 멈췄다.

도준이 달래무침을 좋아했다. 달래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 달래가 있으면 기뻐했다. 봄이 왔다고. 봄이 왔으니까 달래무침 해줘. 그게 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 달래가 나오면 봄이지, 라고 했다.

그 생각이 먼저 왔다.

그 다음 찰나에 없음이 왔다.

아주 짧은 사이였다. 달래를 집으려는 손이 먼저 알았다. 손은 이미 이 동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달래를 집는다. 달래를 집으면 저녁에 무친다. 그게 다 있는 상태로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었다.

수현은 손을 내렸다.


마트 안은 평일 낮이었다. 형광등 불빛. 카트를 끄는 소리. 어디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수현은 봄 채소 코너 앞에 서 있었다. 냉이. 봄동. 달래. 쑥. 가격표들. 비닐봉지.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수현을 보지 않았다. 수현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겨울 내내 도준이 없었다. 겨울에 없는 사람이 봄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봄이 되면서 — 없음이 새로운 방식으로 왔다. 겨울의 없음과 봄의 없음이 같지 않았다.

겨울의 없음은 고요했다. 움직이는 것이 없으니까 없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봄의 없음은 — 돌아오려는 것들이 있는데 도준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달래가 나온다. 낮이 길어진다. 어느 날 냄새가 바뀐다. 그런데.

그런데 없다.


수현은 카트를 밀고 과일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

달래는 사지 않았다.

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 손이 내려갔다. 그것뿐이었다.

과일 코너에 귤이 있었다. 귤은 가을 것인데 봄까지 남아 있었다. 수현은 귤 몇 개를 집었다. 도준이 귤을 좋아했는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었다.

카트 안에 귤이 굴러다녔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바람이 있었다. 3월이었다. 아직 찼다. 그런데 겨울 바람과는 달랐다. 뭔가 섞여 있었다. 흙 냄새인지, 꽃 냄새인지, 아직 정확히 모를 것들이.

수현은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세상이 봄이 됐다는 것을 이상하게 실감했다. 도준이 없는데 봄이 됐다는 것이 아니라. 봄이 됐다는 것. 그것만.

달래가 나왔다.

봄이 왔다.

그것뿐이었다.


9장

산에 처음 간 것은 딸의 제안이 아니었다.

이지안이 먼저 말했다. 등산 가도 될 것 같다고. 딸이 눈을 크게 떴고, 이지안은 등산은 아니고 그냥 걷는 것이라고 했다. 딸이 같이 가겠다고 했다. 이지안은 혼자 간다고 했다. 딸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지안의 얼굴을 보더니 말을 삼켰다. 가방을 챙겨줬다. 물통을 넣어줬다. 이지안은 가방을 받아들고 나왔다.

3월 말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고, 아직 쌀쌀했다.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냄새가 달라졌다.

흙 냄새였다. 젖은 흙과 마른 흙이 섞인 것. 이지안은 그 경계를 알아차리면서 —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냥 냄새가 바뀐 것을 알았다. 그것뿐이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걷기 시작하면서 조금 빨라졌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이미 6개월이 지났으니까 — 이제는 거의 자기 것처럼 느껴졌다.

이지안은 그 구분을 언제 그만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이른 것들이 먼저 피어 있었다. 등산로 옆, 바위 밑, 겨우내 쌓인 낙엽들 사이에서. 이지안은 걸으면서 그것들을 봤다. 분홍. 보라에 가까운 분홍. 가지 끝에 먼저 나온 것들.

잠깐 멈췄다.

이유는 없었다. 이지안은 그 이유를 찾지 않았다. 가을에 그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 멈추고 싶었기 때문에 멈췄다. 발이 먼저였다.

가슴이 한 번 뛰었다.

강하게가 아니었다. 조금 달리게. 평소와 리듬이 달랐다. 이지안은 그것을 느끼면서 꽃을 봤다. 진달래가 거기 있었다. 이지안이 거기 있었다. 심장이 거기 있었다.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마와 등 사이. 이지안은 물통을 꺼내 마셨다. 딸이 넣어준 물. 차가웠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느껴졌다. 요즘은 많은 것이 느껴진다.

작년 봄 이 산에 온 적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왔거나, 오지 않았거나, 왔어도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지안은 그 중 어느 것인지 모른다.

작년의 이지안은 이 봄을 기억하지 못한다.

올해의 이지안은 이 봄을 — 기억할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정상은 가지 않았다.

중간쯤에서 돌아섰다. 몸이 괜찮아서가 아니라 — 여기까지가 오늘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진달래가 또 있었다. 올라갈 때는 못 봤던 것들이었다. 방향이 달랐으니까. 같은 길인데 다른 꽃이 보였다.

이지안은 그것들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미 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까 봤을 때 — 충분했다.


내려와서 입구 벤치에 앉았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딸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다녀왔다고. 핸드폰을 켰다. 화면이 들어왔다.

검색창에 뭔가가 남아 있었다.

강도준.

언제 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번 주가 아니었다. 지난달이었을 것이다. 지웠다가 다시 친 것이다 — 이지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지웠다. 한 번은 검색창을 열고 이름을 쳤다가 닫았다. 검색하지는 않았다.

이름이 거기 있었다.

이지안은 그 이름을 보면서, 지우지 않았다. 검색하지도 않았다. 이름이 거기 있는 것으로 — 충분했다. 아직은.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다녀왔다고. 진달래 피었다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벤치에서 잠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왔다. 3월 말의 바람. 차가운데 뭔가 섞여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 흙 냄새인지, 꽃 냄새인지, 햇빛 냄새인지 — 아직 정확히 모를 것들이.

가슴이 뛰고 있었다.

조용하게. 리듬 있게. 봄 안에서.

이지안은 그것을 느끼면서 바람 쪽을 봤다. 나무들이 조금 흔들렸다. 진달래가 있는 쪽 나무들도. 이지안은 그 방향을 오래 봤다.

무언가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 봄이 거기 있어서.


10장

운동장 끝까지 달렸다.

숨이 찼다. 서연은 멈췄다. 무릎에 손을 짚었다. 숨이 입에서 나왔다. 하얗지 않았다. 봄이니까. 12월에는 하얗게 나왔다. 지금은 그냥 나왔다.

지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야, 늦었잖아, 했다. 서연은 내가 더 빨랐는데, 했다. 지우가 아니거든, 했다.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숨이 아직 돌아오는 중이었다.


숨이 돌아왔다.

서연은 그게 느껴졌다. 달리기 전에 있던 숨이 — 달리고 나서도 돌아온다는 것이. 전에는 잘 안 돌아왔다. 운동장 반쯤 달리면 멈춰야 했다. 선생님이 괜찮니, 했고, 서연은 괜찮아요, 했지만 숨이 돌아오는 데 오래 걸렸다.

지금은 빠르게 돌아왔다.


지우가 다시 달리자고 했다. 이번에는 저 나무까지.

서연은 달렸다.

달리면서 — 발 아래 흙이 느껴졌다. 봄이라 흙이 부드러웠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개나리가 몇 개 피어 있었다. 서연은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은 앞만 봤다.

숨이 찼다. 그런데 멈추지 않았다.

전에는 이만큼 숨이 차면 멈췄다. 오늘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 그냥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달렸다.

나무에 손을 짚었다.


지우가 이겼다고 했다. 서연은 아니거든, 했다.

둘이 숨을 골랐다.

서연은 옆구리를 만졌다. 수술 자국이 있는 쪽. 겨울에 학교에서 지우한테 보여줬던 곳. 지금은 옷 위로 만졌다.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옷이 있었다.

배 쪽이 조금 따뜻했다. 원래 그런 것인지, 달려서 그런 것인지 몰랐다.

아저씨도 달리는 것을 좋아했을까.

생각이 갑자기 왔다. 특별히 생각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지우가 한 번 더 하자고 했다.

서연은 응, 했다.

출발선으로 다시 걸어가면서 서연은 운동장을 봤다. 흙바닥. 개나리. 나무. 아이들. 지우가 앞에서 걷고 있었다. 신발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달리기 전에 서연은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이 들어왔다. 충분히.


달렸다.

숨이 찼다. 그런데 돌아왔다. 숨이 나갔다가 — 돌아왔다.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것이 달리는 동안 계속 됐다.

서연은 그게 느껴지는 채로 달렸다.


나중에 집에 돌아오면서 서연은 엄마한테 말했다. 오늘 운동장 세 번 달렸어.

엄마가 그래? 하면서 서연 머리를 쓸었다. 힘들지 않았어?

서연은 생각했다.

숨이 찼는데 돌아왔어.

엄마가 잠깐 있다가 — 그러면 잘 된 거야, 했다.

서연은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거기 있다는 것이다.


11장

서랍 안에 있었다.

도준이 쓰던 서랍이었다. 수현은 그동안 열지 않았다. 열 이유가 없었다기보다 —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겨울 동안, 봄이 오는 동안. 그 서랍은 닫혀 있었다.

4월이었다.

수현이 서랍을 열었을 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느 날 아침, 거실 창 쪽으로 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전 햇살이 바닥에 닿는 각도가 달라졌다. 겨울보다 낮아져 있었다. 수현은 그것을 보다가 — 서랍으로 손이 갔다.

스케치북이 있었다.

두꺼운 것이었다. 표지가 낡아 있었다. 꺼내면서 무거웠다.


수현은 소파에 앉지 않고 바닥에 앉았다. 책상다리를 하고.

스케치북을 무릎 위에 놓았다. 잠깐 있었다.

그리고 첫 장을 넘겼다.


창문이었다.

연필로 그린 것이었다. 창틀, 유리, 그 너머의 것. 바깥에 나무가 있었다. 잎이 없는 나무였다. 겨울이었거나,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이었다.

수현은 그 그림을 봤다.

도준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끔 식탁 앞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치고 있었다. 수현이 지나가다 보면 — 도준은 덮지 않았다. 보여줬다. 그런데 수현은 그때마다 가볍게 보고 지나쳤다. 잘 그렸네. 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장.

창문이었다.

다른 창문이었다. 이번엔 열려 있었다. 커튼이 있었다. 커튼이 조금 안쪽으로 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있는 것이었다.


수현은 계속 넘겼다.

창문. 창문. 창문.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것들도 있었다. 손. 책상. 창밖의 전봇대. 그런데 돌아보면 — 창문이 많았다. 여러 종류였다. 열린 것, 닫힌 것. 빗물이 흐르는 것. 밤에 찍은 것처럼 유리에 빛이 반사되는 것. 안에서 바깥을 그린 것, 바깥에서 안을 그린 것.

수현은 어느 순간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며 — 생각했다.

당신은 왜 창문을 이렇게 많이 그렸어.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생각했다.


빗물이 흐르는 창문 그림 앞에서 수현은 오래 멈췄다.

병원 창문과 비슷했다. 도준이 입원해 있을 때 — 비가 내리는 날, 수현이 창 쪽을 보면 그런 모양이었다. 유리 바깥을 흘러내리는 물. 안은 형광등 불빛.

그 그림이 그때 그 창문인지, 다른 어떤 날인지 — 수현은 알 수 없었다.

물어볼 수 없었다.


수현은 스케치북 중간쯤에서 멈췄다.

잠깐 있다가, 혼자 — 소리 없이 — 물었다.

동의했겠어.

기증 동의서를 쓴 건 수현이었다. 그날 병원에서, 형광등 아래서, 잉크가 번졌다. 도준은 거기 없었다. 있었지만 없었다.

동의했겠어.

대답이 오지 않았다. 당연히.

수현은 무릎 위의 스케치북을 봤다.

창문이 있었다. 연필로 그린 것이었다. 작은 창문이었다. 창 너머에 하늘이 있었는데 — 도준이 그것을 어디에서 그렸는지 수현은 몰랐다. 이 집의 창문인지, 다른 어딘가의 것인지.

도준이 이것들을 그릴 때 뭘 생각했는지.

모른다는 것이 — 새삼스럽게 왔다.

함께 살았는데. 같은 창을 봤는데. 도준이 창문을 이렇게 많이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 수현은 알고 있으면서 몰랐다.


한참 후에 수현은 스케치북을 덮었다.

일어났다.

창 쪽으로 걸어갔다. 거실 창이었다. 오전 볕이 아직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에 네모난 빛이 있었다.

수현은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봤다.

아파트 단지였다. 나무들이 있었다. 잎이 나고 있었다. 연한 것들이었다. 4월의 것.

도준이 이것을 그렸을 수도 있었다.

이 창문을.

수현은 그냥 서 있었다. 대답이 없는 것 옆에서, 볕이 바닥에 있는 것을 보면서.


12장

5월이었다.

수현이 공원에 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스케치북을 본 뒤로 집 안에서 창문을 자주 봤다. 거실 창, 부엌 창, 화장실 작은 창. 그것을 보다가 — 어느 날 나오고 싶어졌다. 창문 바깥으로.

공원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연못이 있는 공원이었다. 예전에 도준과 가끔 왔었다. 도준이 먼저 가자고 하는 편이었다.

수현은 연못 옆 길을 걸었다.

5월 오전이었다. 햇살이 수면에 있었다. 나무에 잎이 다 났다. 연한 것들이 아니었다. 짙어져 있었다. 초록이 제대로 온 것이었다.


연못 가에 벤치가 몇 개 있었다.

수현은 거기 앉지 않고 그냥 걸었다. 연못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아이가 뛰었다. 수현 앞을 가로질렀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 됐을 아이였다. 뭔가를 향해 달려갔다가 멈췄다가.

수현은 아이가 달려간 방향을 잠깐 봤다.

벤치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 든 남자였다. 칠십 가까이 됐을 것 같았다. 무릎에 손을 얹고 앉아서 — 나무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달려오는 쪽이 아니었다. 나무를.

수현은 시선을 거뒀다.

다시 길을 걸었다.


윤재현은 나무를 보고 있었다.

나뭇잎이 보였다. 잎 하나하나가 보였다. 빛이 잎을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어떤 잎은 밝고, 어떤 잎은 어두운 것이 — 다 보였다.

예전에는 나무가 거기 있었다. 초록이었다. 그게 나무였다.

지금은 나무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를 때가 있었다. 볼 것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아직 어색했다.

민호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저기 오리 있어요.”

연못 쪽이었다. 윤재현은 민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봤다. 오리가 있었다. 두 마리였다. 한 마리는 물 위에 있고, 한 마리는 물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둘 다 보였다. 깃털 하나하나까지.

“그래.”

민호는 다시 달려갔다.

윤재현은 연못을 봤다.

수면에 빛이 있었다. 움직이는 빛이었다. 잔물결을 따라 반짝이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게 다 보였는지 — 묻는 사람이 없었다. 민호는 알지 못했다. 며느리도. 아들도.

다 보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게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수현이 연못을 반쯤 돌았을 때였다.

앞에 벤치가 있었다. 아까 봤던 벤치였다. 남자가 아직 거기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연못 쪽을 향해 쪼그려 앉아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현은 그 옆을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 남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잠깐 봤다. 연못이었다. 수면 쪽이었다. 빛이 움직이는 곳.

수현도 연못을 봤다.

수면에 빛이 있었다. 잔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것이었다. 도준이 이런 것을 그린 적이 있었는지 — 수현은 기억하지 못했다. 스케치북 안에 연못이 있었는지. 봤을 때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걸었다.


윤재현은 연못을 보다가 — 길 쪽을 봤다.

여자가 지나갔다. 서른 중반에서 마흔 사이쯤 됐을 여자였다. 혼자였다. 천천히 걷고 있었다. 공원을 산책하러 온 것 같았는데, 뭔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가 지나치면서 연못 쪽을 봤다.

수면을. 빛이 있는 쪽을.

윤재현은 여자가 걷는 것을 잠깐 봤다.

그리고 다시 연못을 봤다.

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현은 벤치 남자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연못을 한 바퀴 다 돌았다.

입구 쪽으로 나오면서 수현은 한 번 돌아봤다. 남자는 아직 벤치에 있었다. 아이는 남자 쪽으로 달려가다가 다시 방향을 바꿨다. 민들레가 있었다. 아이가 민들레 앞에 섰다.

수현은 나왔다.


윤재현은 민호가 민들레 앞에 서 있는 것을 봤다.

민들레가 보였다. 홀씨가 달린 것이었다. 아직 날리지 않은 것. 민호의 눈이 그것을 향해 있었다.

“불면 날아가.”

민호가 불었다. 홀씨가 날았다. 하얀 것들이 공중에 흩어졌다. 하나하나가 보였다.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멀리 가는지. 보였다.

바람이 와서 몇 개를 더 멀리 보냈다.

연못 쪽으로 날아가는 것도 있었다.

수면에 닿는 것은 — 보이지 않았다. 너무 멀었다.

윤재현은 홀씨들이 가는 방향을 봤다.

아까 여자가 걷던 방향이었다.


13장 — 따뜻함

7월이었다.

수현이 마포 카페에 온 것은 오후 두 시쯤이었다. 이유 없이.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마포에서 내렸다. 내려야 한다는 생각보다 발이 먼저였다.

문을 열자 찬 공기가 얼굴에 왔다. 바깥이 더워서 그 차이가 선명했다. 몸이 잠깐 두 온도 사이에 있었다.

창문 쪽 자리가 비어 있었다. 수현은 거기 앉았다.


에어컨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7월 골목은 밝았다.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위 속에 있었고, 카페 안은 그것과 분리된 온도였다. 수현은 그 경계에 앉아 있었다. 유리 한 장 너머가 여름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빛이 손 위에 닿아 있었다. 오후 두 시의 빛이 이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준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수현은 몰랐다. 그냥 따뜻하다고만 생각했다.


자리를 고를 때 여자가 들어왔다.

오십대쯤으로 보였다. 더위 속에서 왔는지 이마에 땀이 조금 있었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자리를 둘러봤다. 카페 안이 절반쯤 차 있었다. 창문 쪽 자리들은 거의 찼고, 수현이 앉은 테이블 맞은편만 비어 있었다.

여자가 왔다. 수현을 보았다. 수현도 보았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네, 앉으세요.”

여자가 앉았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도 창문을 보았다. 골목에 아이 둘이 지나갔다. 빠르게.

커피가 나왔다. 두 잔이 같은 시간에 나왔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때에 컵을 들었다.


말은 없었다.

수현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여자도 마셨다. 에어컨 소리가 바뀌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여름이 계속 있었다.

여자가 창문을 보는 방식이 있었다. 수현이 그것을 직접 보지는 않았는데 — 알았다. 보고 있다기보다 있었다. 그냥 창문 앞에 있는 것. 이유 없이.

수현도 그랬다.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없었다. 창문 쪽에 앉은 이유도 없었다.


빛이 테이블 위로 이동했다. 오후 빛은 천천히 각도를 바꾼다. 수현의 손이 빛 안에 있다가, 빛이 조금 내려가면서 손 옆의 테이블이 밝아졌다. 여자의 컵도 그 빛 안에 들어왔다.

여자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냥 숨을 쉬고 있었다. 수현도 숨을 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빛이 있었다. 에어컨 소리가 있었다. 창문 너머의 여름이 있었다.


수현은 그 자리에서 오래 있었다.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있었다.

그냥 좋았다.

창문 너머로 한 남자가 지나갔다. 자전거였다.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여자가 그 방향을 잠깐 봤다. 수현도 봤다. 자전거는 이미 없었다.


여자가 먼저 일어섰다.

컵을 내려놓고, 가방을 들었다. 수현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도 끄덕였다. 여자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잠깐 여름이 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수현은 여자가 앉았던 자리를 봤다.

빛이 거기에도 있었다. 아직.


이름을 몰랐다.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다. 왜 이 카페에 왔는지도. 다시 볼 것 같지 않았다.

괜찮았다.

수현은 컵을 들었다. 식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이었다. 마셨다.

창문으로 오후 빛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도준이 계산한 각도로. 수현은 그것을 몰랐다. 그냥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