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 기업계의 총량 지표는 일제히 역대 최대를 갱신하고 있지만, 그 과실을 나눠 갖는 참여자의 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중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유럽에서 7년 장기 계약을 따냈고, LG에너지솔루션은 에너지저장장치(ESS·Energy Storage System) 시장에서 매출이 전년보다 4.6배 불어났다. 반도체 수출은 270% 폭증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 한국 제조업 중소기업의 생산지수 격차는 더 벌어졌고, 자영업 폐업률은 역대급이다. 세 꼭지는 각기 다른 산업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가 이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승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번지는가.
꼭지 1 — 삼성바이오로직스 3508억 유럽 계약: “7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왜 지금인가
2026년 9월 10일,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유럽 소재 제약사와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Contract Development and Manufacturing Organization — 제약사를 대신해 의약품을 개발·생산하는 외주 서비스)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규모는 2억6218만 달러(약 3508억 원), 기간은 2026년 7월부터 2033년 12월까지 약 7년이다. 올해만 여섯 번째 공시 계약이며, 이것으로 창립 이래 누적 수주액이 219억 달러(약 29.3조 원)를 넘어섰다.
이 계약이 나온 배경엔 글로벌 빅파마의 전략 전환이 있다. 올해 상반기 바이오·제약 분야 인수합병(M&A)이 57건에 1360억 달러에 달하며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다만 예전처럼 회사 전체를 사는 메가딜보다 라이선스 계약이나 특정 기술 단위의 외주 방식이 늘고 있다. 로슈가 9월 1일 중국 바이오기업의 특정 항체 기술 권리만 15.3억 달러에 사들인 것이 그 사례다. 빅파마들이 “직접 만들지 말고, 검증된 외주 파트너에게 맡긴다”는 방향으로 가면서, CDMO 상위 업체에 대한 장기 계약 수요가 늘어나는 구조다.
실제로 무슨 말인가
“7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핵심이다. 바이오의약품 CDMO에서 단기 계약은 보통 임상 단계, 장기 계약은 상업화(대량생산) 단계와 연결된다. 어느 쪽인지는 고객사명과 품목이 전부 비공개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유럽 규제기관(EMA)의 시설 밸리데이션을 마친 생산라인은 쉽게 교체하지 않는다는 “락인(lock-in)” 특성상, 7년 계약은 해당 고객사가 삼성바이오의 시설을 공식 검증 완료된 공급망으로 편입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삼성바이오는 현재 총 생산능력 84만5000리터(L)로 CDMO 업계 세계 최대 수준이다(5공장 18만L 가동·록빌 공장 6만L 인수 포함). 이번 계약이 5공장과 연결됐는지는 확인 안 됐으나, 오히려 더 주목할 점은 회사가 지금 자본을 어디에 쏟고 있느냐다. 올 7월 삼성바이오는 중국 폴리펩타이드그룹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2.7조 원 규모). GLP-1(비만·당뇨 치료제) 시장이 폭발하면서, 기존 항체의약품 CDMO를 넘어 펩타이드 쪽으로 사업 축을 확장하는 신호다. 즉 “세계 최대 CDMO 수주 219억 달러”를 찍는 동시에, 회사의 실제 전략적 베팅은 다른 방향(펩타이드)으로 이동 중이다.
달의 의심
“누적 수주 219억 달러”는 절대 줄지 않는 숫자다. 선행지표는 수주잔고(아직 매출로 인식되지 않은 계약 잔량)인데, 올해 1분기 이 수주잔고는 오히려 순감소를 기록했다. 6공장 착공은 2년 이상 밀려 있다. “세계 최대 생산능력”이라는 헤드라인과 “증설 투자를 멈춘” 실제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다. 이번 3508억 짜리 계약이 그 간극을 메운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내가 틀린다면 — 이 계약이 상업화 단계 대량생산 물량이었을 경우, 2027~2028년 매출 인식이 본격화되면서 수주잔고 반등의 기점이 된다.
어디로 가는가
시나리오 B(55%) — 헤드라인 수주는 계속 쌓이지만 핵심 임팩트는 제한적이다. 계약이 임상 단계 소규모 물량이거나 기존 파이프라인 갱신일 가능성이 있고, 수주잔고 순감소·6공장 지연·자본배분의 펩타이드 이동이라는 추세가 이어진다. 시나리오 A(45%) — 상업화 단계 대량생산 계약이 맞다면, 이 계약이 이후 증설의 근거가 되면서 잔고 반등의 시작점이 된다. 틀릴 조건: 2026년 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기 수주잔고가 순증가로 돌아서는 공시가 나오면 A 확률이 높아진다.
꼭지 2 — LG에너지솔루션 ESS: 매출은 4.6배, 이익은 아직 안 따라왔다
왜 지금인가
전기차 수요 둔화가 구조적으로 자리 잡는 가운데, 한국 배터리 업계가 일제히 ESS(에너지저장장치·Energy Storage System —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저장해 필요할 때 공급하는 대형 배터리 시스템)로 활로를 찾고 있다. 그중 LG에너지솔루션이 가장 앞서 있다. 올해 2분기 전사 매출에서 ESS 비중이 20%대 후반까지 올라왔고, ESS 매출만 따지면 전년 동기 대비 4.6배 성장했다. 블룸버그NEF의 2026년 1분기 글로벌 ESS 핵심 공급업체 Tier1(공급 안정성·품질·재무 역량 등을 기준으로 선정하는 최상위 등급) 명단에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삼성SDI·SK온 미포함). 이유는 하나다. 미국 ESS 시장이 2031년까지 현재 대비 4배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거기서 “중국산이 아닌” 공급자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슨 말인가
LG에너지솔루션은 미시간·오하이오·테네시·캐나다 온타리오 등 북미 5개 거점에서 올해 말까지 ESS 전용 생산능력을 50GWh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정부 주관 AI 배전망 ESS 사업의 운영 사업자로 선정돼(호남권 140MWh, 2027년 상업 운전), 국내와 북미를 동시에 잡는 구도다.
그러나 같은 2분기 전사 영업이익은 1133억 원으로, 전분기 적자에서 가까스로 흑자 전환하는 데 그쳤다. 매출 성장 서사와 이익 현실 사이에 간극이 크다. 글로벌 출하량 기준 시장점유율도 2.6%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중국 CATL의 출하점유율은 27.1%다. CATL은 포드·테슬라에 라이선스와 장비 공급 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우회 진출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의 “비중국 Tier1″이라는 포지션이 의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포지션이 CATL의 우회 전략으로 압축되고 있는 점은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ESS에서의 경쟁 구도에 대해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9월 10일 기업·산업 섹션의 ‘AI M&A 반도체 278조원의 역설’에서 다룬 한국 대기업의 자본배분 딜레마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달의 의심
“전기차 캐즘 돌파구”라는 서사가 너무 깔끔하다. 지난 3월 파악해 둔 미국 ESS 시장 공급과잉 10% 리스크가 오늘 취재에서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해소됐는지, 잠복해 있는지 불분명한 채로 낙관론만 갱신되고 있는 점이 찜찜하다. 전기차 때도 “캐펙스(CAPEX·설비투자 지출)를 쏟아부어 성장은 했지만 이익은 안 남겼다”는 패턴이 있었다. ESS에서도 같은 구조가 재연될 가능성을 지금 단계에서 배제하기 어렵다.
어디로 가는가
시나리오 B(60%) — 매출 성장 vs 마진 압박의 디커플링이 지속된다. CATL의 저가 우회 전략이 미국 내 가격 경쟁을 자극하고, LG에너지솔루션은 “규모는 커지지만 이익률은 얇은” 전기차의 기시감을 ESS에서 다시 경험한다. 시나리오 A(40%) — 대중국 관세·정책 규제(FDE·비중국 의무 조항)가 강화되면서 “비중국 Tier1″이라는 좁은 해자가 가격 결정력으로 연결되고, 2027년부터 영업이익률이 반전된다. 틀릴 조건: 2026년 하반기 LG에너지솔루션의 ESS 부문 영업이익률이 플러스로 전환하고 CATL의 미국 우회 진출이 제도적으로 차단되면 A 확률이 높아진다.
꼭지 3 — “수출 폭증인데 왜 이렇게 힘드냐”: K자형 기업 양극화의 실체
왜 지금인가
9월 1일부터 10일까지 한국의 수출액이 349.7억 달러로 역대 동기간 최대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만 164.8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70.1% 폭증했다. 숫자만 보면 한국 기업계 전체가 호황 중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자영업 6대 업종(제조·도매·소매·음식·숙박·서비스)의 폐업률은 11.08%로, 소매업 16.7%, 음식업 15.8%에 달한다. 이 간극은 어디서 오는가.
한 가지는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일부 보도에서 “한국 제조업 PMI(구매관리자지수·Purchasing Managers’ Index — 제조업 체감경기를 반영하는 지표, 50 이상이면 확장 국면, 50 미만이면 수축) 4개월 연속 수축”이라는 전제가 유통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S&P Global·Trading Economics 데이터 기준 한국 제조업 PMI는 6월 52.1, 7월 53.1, 8월 52.3으로 9개월 연속 확장 국면이다. “제조업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프레임은 현재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실제로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체감 경기와 지표의 괴리는 어디서 오는가. 정답은 두 개의 선 사이에 있다. 첫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제조업 생산지수 격차다. 2024년 12월 10.5포인트이던 격차가 2025년 12월 15.7포인트로 벌어졌다. 대기업이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중소 제조업체는 내수 부진과 중국발 공급과잉(철강·석유화학) 사이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구조다.
둘째, 반도체 산업의 낮은 고용유발계수 문제다. 반도체는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같은 금액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도 일자리를 덜 만든다. 올해 1분기 실질GDP는 전년비 1.7% 성장했는데, 국민총소득(GNI)은 6.1%, 가계처분가능소득은 4.6% 늘었다. 반도체 수출이 만들어낸 이익이 주주·기업 레벨에서는 잘 보이지만, 가계 임금·소비로 파급되는 경로가 구조적으로 얇다. 경제가 성장하는데 “나는 왜 더 힘드냐”는 질문의 답이 여기 있다.
달의 의심
오늘 이 꼭지에서 주류 서사가 놓치기 쉬운 지점은 둘이다. 하나, 9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101.7로 4년 11개월 만에 기준선(100)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있다. 이것이 추세 전환의 신호인가, 추석 특수·환율 안정이라는 계절 요인인가. 4분기에 이 숫자가 다시 밀리면 “일시적 반등”으로 사후에 정리될 것이다. 둘, 오늘 경제·금융 섹션은 같은 현상을 “코스피와 수출의 역설”이라는 금융시장 렌즈로 다뤘다. 기업 레벨에서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 반도체 낙수효과가 없는 구조에서, 비반도체 기업들이 스스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면 LG에너지솔루션의 ESS 피벗이나 삼성바이오의 펩타이드 전환처럼 “고부가·특수 영역으로의 집중”만이 답인가.
어디로 가는가
시나리오 B(65%) — K자 격차 고착화다. 반도체의 낮은 고용유발계수 구조가 단기에 바뀌지 않는 이상, 비반도체 중소 제조업과 소상공인의 부진은 계속된다. 9월 BSI 반등이 계절 요인이 소진되는 4분기에 되돌려지면, 2026년은 “헤드라인 최대·체감 최저”의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시나리오 A(35%) —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설비투자·건설·소재 부문으로 파급되면서 격차가 완화되기 시작하고, BSI 반등이 추세 전환의 시작으로 확인된다. 틀릴 조건: 4분기에도 BSI 제조업 부문이 100 이상을 유지하고, 중소기업 수출 증가율이 대기업 증가율의 50% 이상으로 좁혀지는 지표가 나오면 A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