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유진의 새벽
1부
새벽 다섯 시. 유진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손이 움직였다. 침대 옆 탁자를 더듬어 핸드폰을 집었다. 화면이 켜지면서 얼굴에 파란 빛이 번졌다. 카톡 알림이 없었다. 잠금화면의 시간만 보였다. 05:02.
핸드폰을 엎어놓았다. 손이 먼저 아는 동작이었다. 천장을 봤다. 창문 틈으로 새벽 바람이 들어왔다. 침대 옆자리가 넓었다. 5년을 같이 쓰던 자리가 두 달째 비어 있었다. 이불은 유진 쪽으로만 구겨진 채 밀려 있었다. 빈자리는 차갑지 않았다. 그냥 넓었다.
일어났다.
숨이 얕아졌다.
밖으로 나갔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끈을 묶지 않았다. 잠바 지퍼를 올렸다. 문을 열자 가을 새벽의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치고 폐 안으로 내려갔다.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골목을 걸었다.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이 골목 끝까지 줄지어 서 있었다. 유진의 그림자가 가로등 하나를 지날 때마다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했다. 발소리만 들렸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를 누르는 소리.
공원 입구에 섰다. 철제 아치 아래를 지나자 나무들이 양쪽으로 서 있었다. 가을이 깊었다. 나뭇잎들은 떨어지다 만 채로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중 몇 개가 소리 없이 내려왔다. 가로등 불빛이 땅에 깔린 낙엽 위를 비추고 있었다. 노란 빛이 갈색 잎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2부
벤치가 보였다. 공원 한가운데, 큰 느티나무 아래. 가로등 하나가 바로 옆에 서 있어서 벤치 위로 노란 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어둠이었다.
벤치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유진의 발이 멈췄다.
남자였다. 젊었다. 후드티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벤치 왼쪽 끝에 앉아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어딘가에 놓여 있었지만, 무언가를 향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냥 열려 있는 눈.
유진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유진도 고개를 숙였다.
그것뿐이었다.
유진은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았다. 오른쪽 끝. 두 사람 사이에 한 사람 반쯤이 앉을 수 있는 거리가 있었다. 차가운 나무가 허벅지 뒤쪽에 닿았다. 잠바가 얇아서 냉기가 스며들었다.
앉으니까 하늘이 보였다.
새벽별 몇 개. 어두운 하늘 높은 곳에 아직 남아 있었다. 곧 지워질 것들. 유진은 그 별들을 올려다봤다. 이름을 몰랐다. 그냥 거기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느티나무 가지가 천천히 흔들렸다. 낙엽 한 장이 놓였다.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공기 위에 잠깐 머물다가 천천히 기울었다. 가로등 빛 속을 지나는 순간 노랗게 빛났다가, 두 사람 사이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어딘가에서 새 한 마리가 울었다. 짧게. 그리고 멈췄다. 그 울음이 멈추자 고요가 돌아왔다. 유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자기 숨소리가.
같은 어둠.
시간이 지났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몸이 조금씩 식어갔다. 허벅지 뒤쪽의 냉기가 등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유진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낙엽 몇 개가 벤치 앞으로 느리게 굴러갔다. 사각사각. 마른 잎이 땅 위를 스치는 소리. 가로등 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은 불었지만 빛은 고요했다.
하늘이 아주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밝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둠의 색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먹빛이 조금씩 남색에 가까워졌다. 밤이 아침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유진이 일어섰다.
출근해야 했다. 편집부 회의가 아홉 시였다.
벤치에서 일어서면서 남자 쪽을 봤다. 남자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아까와 같은 자세였다. 어디에도 가지 않을 사람처럼.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도 고개를 숙였다. 살짝.
유진은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낙엽을 밟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원을 나왔다. 골목이 보였다. 가로등이 아까보다 흐려진 것 같았다. 하늘이 달라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왔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었다. 샤워를 했다. 옷을 입었다. 가방을 챙겼다.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하루가 시작됐다.
바깥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잠깐, 벤치의 냉기가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2장: 준혁의 새벽
새벽 세 시. 준혁이 천장을 봤다.
천장에 금이 하나 있었다. 입주할 때부터 있었다. 왼쪽 벽 모서리에서 시작해서 형광등 옆을 지나 천장 가운데쯤에서 멈춰 있었다. 밤마다 그 금을 봤다. 금은 자라지 않았다.
이력서 파일이 바탕화면에 있었다. ‘한준혁이력서최종.docx’. 최종이라고 썼는데 최종이 아니었다. 3주째 열지 않았다. 노트북은 책상 위에서 충전 중이었다. 초록불이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
통장 잔고가 떠올랐다. 387만 원. 월세 55만 원. 관리비 8만 원. 밥값. 교통비. 세 달 반이면 바닥이 보였다. 숫자가 또렷했다. 새벽 세 시에는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뒤척였다. 이불이 다리를 감았다. 풀어냈다. 또 감겼다.
엄마에게 전화하면 “밥은 먹었니”라고 물을 것이었다. 도윤에게 카톡을 보내면 “여기 뽑는다, 이력서 넣어봐”라고 할 것이었다.
스타트업에서 2년 반을 일했다. 코딩을 했다. 야근을 했다. 배포를 했다. 장애가 나면 새벽에 일어나서 고쳤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일어날 수 없었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몸 안쪽 어딘가가 — 비어 있었다.
마지막 날 기억이 있었다. 팀장이 회의실에서 “이게 왜 이렇게 됐어요?”라고 했다. 준혁은 코드를 설명했다. 왜 그렇게 짰는지, 다음에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설명하는 동안 — 자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는 났는데,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켰다. 그리고 —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었다.
퇴사한 지 3개월.
네 시.
잠을 포기했다.
일어났다.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를 입었다. 주머니에 핸드폰과 열쇠를 넣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가을 새벽의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차가웠다. 코끝이 시리고, 그 시린 것이 폐까지 내려갔다. 방 안의 천장과 금과 숫자들이 뒤로 밀려났다. 잠깐이라도.
걸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큰길로 나갔다. 신호등이 빨간불과 초록불을 번갈아 비추고 있었다. 차가 없었다. 이 시간에는 신호등도 무의미했다. 건넜다.
발이 갔다.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 골목을 돌고, 큰길을 건너고, 또 골목을 돌았다. 어딘가 배수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로등 불빛이 보도블록 위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준혁은 그 원 안을 걷다가 원 밖으로 걷다가, 다시 원 안으로 들어갔다.
공원이 보였다. 철제 아치.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이 서 있었다. 가을이 깊었다. 잎이 절반쯤 떨어진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사이로 별이 보였다. 바람이 불면 잎 하나가 내려왔다. 소리 없이, 가로등 빛 속을 지나면서 잠깐 빛났다가 사라졌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발밑에 낙엽이 쌓여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벤치가 있었다. 큰 느티나무 아래. 가로등 하나가 벤치 위를 노란 빛으로 덮고 있었다.
누가 앉아 있었다.
여자였다. 혼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잠바를 입고 있었다. 가방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가로등 빛이 머리카락 위에 닿아 있었다. 얼굴은 반쯤 어둠 속이었다.
이 시간에 사람이 있었다.
준혁은 멈췄다. 잠깐. 돌아갈까 생각했다. 돌아가서 어디로. 방으로. 천장으로. 금으로.
걸었다.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았다. 나무가 차가웠다. 등이 등받이에 닿았다.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짧게 마주쳤다. 여자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준혁도 고개를 숙였다.
그것뿐이었다. 여자는 다시 하늘을 봤다.
준혁도 하늘을 봤다. 별이 있었다. 몇 개. 도시의 하늘이라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는 보였다. 빌딩 불빛이 꺼지고 가로등만 남으면, 별이 드러났다.
바람이 불었다. 느티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서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 벤치 아래로 갔다. 또 하나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벤치 위에,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고요했다.
숨이 조금, 아까보다 깊이 들어갔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낙엽 몇 개가 벤치 앞으로 굴러갔다. 사각사각. 마른 잎이 땅 위를 스치는 소리. 가로등 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은 불었지만 빛은 고요했다.
시간이 지났다.
여자가 일어섰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벤치에서 일어서면서 — 준혁 쪽을 봤다. 짧게.
고개를 숙였다. 준혁도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가방이 걸음에 맞춰 약간 흔들렸다. 발소리가 낙엽을 밟으며 사각거렸다. 점점 멀어졌다. 가로등 빛을 지나고, 어둠을 지나고, 다음 가로등 빛을 지나고, 사라졌다.
준혁은 남았다.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여자가 앉아 있던 반대쪽 끝이 비어 있었다. 낙엽 한 장이 거기 남아 있었다.
하늘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먹빛이었던 하늘이 — 아주 천천히, 동쪽부터 남색으로 변했다. 별이 하나 사라졌다. 또 하나. 가장 밝은 별만 아직 남아 있었다. 가로등 빛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가로등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밤과 아침이 같은 밝기가 되는 순간이 왔다. 잠깐. 그리고 아침이 이겼다.
남색이 회색으로. 회색이 연한 보라로.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 전체가 빛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빛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새가 울었다. 한 마리. 짧게. 그리고 다른 새가 답했다. 멀리서.
공원의 나무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느티나무의 가지가 선명해졌다. 산책로 위의 낙엽이 색깔을 찾았다 — 어둠 속에서는 같은 색이었던 것들이, 빛 속에서 갈색과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갈라졌다.
하늘이 완전히 밝아왔다. 가로등이 꺼졌다. 벤치 위의 노란 빛이 사라지고, 아침의 하얀 빛이 대신 내려앉았다.
일어섰다.
걸었다. 공원을 나갔다. 거리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사람들. 빠른 걸음. 커피를 든 손. 이어폰을 낀 귀. 그 사이로 준혁이 걸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 아무것도 꽂지 않은 귀.
방에 돌아왔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었다. 후드티를 벗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금이 보였다. 아까와 같았다. 자라지 않았다.
공원의 공기가 아직 폐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나무 벤치의 감각이 허벅지 뒤에 남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3장: 가로등 아래
며칠이 지났다.
유진은 매일 새벽 벤치에 나왔다. 남자는 먼저 와 있었다. 유진이 도착하면 서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것뿐이었다.
이름을 몰랐다. 묻지 않았다. 오고 가는 것은 고개를 숙이는 인사와, 떠날 때의 “안녕히 계세요” 한마디. 그 사이에 —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달랐다.
밤에 비가 왔다. 유진이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올라왔다. 비는 그쳤지만 아직 젖어 있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평소의 건조한 가을 새벽 공기가 아니었다. 수분이 섞여 있었다. 피부에 닿으면 축축했다.
운동화를 신었다. 끈을 묶지 않았다. 잠바를 입었다. 문을 열었다.
골목 바닥이 젖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번져 있었다. 노란 빛이 흘렀다. 발밑에서 물이 가볍게 찰싹거렸다. 바람은 없었다. 비 온 뒤의 고요. 나뭇잎 냄새가 진했다 — 마른 낙엽이 비에 젖으면 냄새가 달라졌다. 흙 냄새와 섞였다. 가을 냄새가 아니었다.
공원 입구. 철제 아치 위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가로등 빛이 물방울을 비추고 있었다. 작은 빛들이 아치 위에 줄지어 있었다.
산책로를 걸었다. 낙엽이 젖어 있어서 바스락거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었다. 발이 젖은 잎을 밟으면 눌리는 감각만 있었다.
벤치가 보였다. 느티나무 아래. 가로등 빛이 벤치 위를 비추고 있었다.
젖어 있었다. 벤치 전체가 비에 젖어 있었다. 나무 표면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가로등 빛이 젖은 나무 위에서 반사되어 — 빛이 흔들리지 않는데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서 있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접어서 벤치 위를 닦았다. 자기가 앉는 자리. 오른쪽 끝. 손수건이 나무 표면의 물기를 흡수했다. 두세 번 문지르면 나무가 드러났다. 아직 축축하지만 앉을 수 있었다.
손이 멈췄다.
벤치 왼쪽 끝. 남자가 앉는 자리. 젖어 있었다.
유진의 손이 — 멈췄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손수건이 벤치 가운데를 지났다. 두 사람 사이의 빈 자리를 지나, 왼쪽 끝까지. 물기를 닦았다. 한 번, 두 번. 나무가 드러났다.
손이 돌아왔다, 자기 쪽으로.
손수건을 접었다. 가방에 넣었다.
앉았다.
하늘을 봤다. 비 온 뒤의 하늘은 구름이 걷히면서 별이 한두 개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하늘. 구름 사이로 빛이 깜빡이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발소리가 들렸다.
젖은 낙엽을 밟는 소리. 바스락이 아니라 축축한 눌림. 가까워졌다.
남자였다.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 빗방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로등 빛 안으로 들어오면서 얼굴이 보였다. 벤치를 봤다. 잠깐 멈췄다.
남자의 시선이 벤치 위를 지나갔다.
아무 말 없이 앉았다. 왼쪽 끝. 유진이 닦아놓은 자리에.
유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늘을 봤다.
두 사람 사이의 빈 자리. 마른 나무. 바람이 잠시 멈춰 있었다.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벤치 앞 땅에. 작은 소리.
고요했다.
남자가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 숨이 약간 하얗게 피어올랐다. 유진의 숨도 하얗게 피어올랐다. 두 사람의 숨이 가로등 빛 안에서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아까 편의점에 들렀다. 출근길에 마시려고 음료를 샀다. 계산대에서 하나를 집었다. 그런데 손이 하나를 더 집었다. 계산하고 나와서야 알았다. 하나는 가방 안에 있었다. 차가워지고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났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물방울이 가끔 떨어졌다. 하나씩. 그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멈추는 듯하다가 또 떨어졌다. 유진은 그 소리를 세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하늘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먹빛이 남색에 가까워졌다.
유진이 일어섰다.
“안녕히 계세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살짝. 눈이 그쪽을 향했는지 — 가로등 그림자 때문에 확실하지 않았다.
유진은 걸었다. 가방이 무거웠다. 음료 한 개만큼 무거웠다. 산책로를 따라. 젖은 낙엽 위를. 소리가 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원을 나왔다. 골목에서 멈췄다. 가방을 열었다. 음료를 꺼냈다. 차가웠다. 뚜껑을 땄다. 마셨다.
혼자 마셨다.
출근길.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낀 사람들. 빠른 걸음. 유진도 걸었다. 편집부 회의가 아홉 시였다. 오늘 검토할 원고가 세 건 있었다.
가방 안에 젖은 손수건이 있었다. 벤치의 물기를 머금은 손수건. 빨아야 했다.
그 손수건이 벤치 끝까지 닿았다가 돌아왔다는 것을 — 아무도 모른다.
4장: 가을의 끝
느티나무에 잎이 거의 없었다.
준혁은 벤치에 앉아서 그것을 올려다봤다. 일주일 전만 해도 가지에 반쯤 붙어 있었다. 이제는 가지만 남아 있었다. 하늘이 가지 사이로 그대로 보였다. 잎이 사라졌기 때문에 별이 더 잘 보였다.
새벽 공기가 달라졌다. 11월이 가까워지면서 — 공기가 얇아졌다. 폐에 들어가면 빈 것 같았다. 손이 외투 주머니 안에 있었다. 귀가 차가웠다.
발소리가 들렸다.
산책로를 따라. 운동화 밑창이 낙엽을 밟는 소리 — 요즘은 마른 낙엽이었다. 비 온 날과 달랐다. 짧고 바스락거렸다. 가까워졌다.
여자였다.
잠바가 바뀌었다. 지난주까지는 얇은 잠바였는데, 오늘은 두꺼운 것으로 바뀌었다. 가방을 어깨에 건 자세는 같았다. 벤치 쪽으로 걸어오면서 가로등 빛 안으로 들어왔다. 준혁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준혁도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오른쪽 끝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벤치 한 사람 반쯤의 거리. 늘 같은 거리였다.
하늘을 봤다. 여자가. 준혁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잎이 없으니 가지의 구조가 보였다. 굵은 줄기에서 가는 가지가 뻗어 있고, 가는 가지에서 더 가는 것이 뻗어 있고, 그 끝에서 더 가는 것이 뻗어 있었다. 하나의 나무가 얼마나 많은 방향으로 자라왔는지 — 잎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가지가 흔들렸다. 마지막 낙엽 몇 장이 떨어졌다. 빙글 돌다가, 가로등 빛을 지나면서 잠깐 빛나다가, 땅으로 갔다. 두 사람 사이에도 하나가 떨어졌다. 벤치 위에, 두 사람 사이의 빈 자리에.
아무도 줍지 않았다.
고요했다.
준혁은 이 새벽이 언제부터 이랬는지 생각했다. 처음 이 벤치에 왔을 때 — 갈 곳이 없었다. 방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지금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력서는 아직 열지 않았다. 통장 잔고는 줄었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 새벽에는 — 숨이 쉬어졌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뿐인데.
손이 주머니 안에서 펴졌다.
바람이 또 불었다.
나뭇가지들이 낮게 흔들렸다. 느티나무에서 마지막 잎들이 떨어졌다. 몇 장 안 남은 것들이었다. 내일 오면 아마 없을 것이었다. 이제 이 나무는 겨울 나무였다.
준혁은 그것을 봤다.
옆에 여자가 있었다. 여자도 나무를 보고 있는지, 하늘을 보고 있는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지 — 몰랐다. 여자가 보는 것을 준혁은 볼 수 없었다.
날이 더 추워지면 — 이 사람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준혁 자신도 몰랐다. 자신이 계속 나올지. 12월이 되고, 1월이 되고, 눈이 내리면 — 새벽에 여기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그 이유가 있을까.
가로등이 흔들렸다. 바람 때문에. 두 사람이 앉은 벤치 위의 노란 빛이 조금 흔들렸다.
생각을 멈췄다.
지금 여기 있었다. 지금 이 새벽이 있었다. 가을 새벽의 공기가 폐에 들어오고 있었다. 옆에 여자가 있었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별이 보였다.
시간이 지났다.
여자가 일어섰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준혁 쪽을 봤다. 짧게.
“안녕히 계세요.”
가을 공기와 같은 온도의 목소리였다. 새벽 공기 속에 잠깐 남았다가 사라졌다.
준혁이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이제 발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 낙엽이 적으니까. 마른 땅과 낙엽이 번갈아가며 발밑에 깔리는 소리. 멀어졌다. 가로등 빛을 지나고, 어둠을 지나고, 아치 문을 통과하고, 사라졌다.
준혁은 남았다.
혼자 앉아 있었다. 오른쪽 끝이 비어 있었다. 벤치 위에, 두 사람 사이의 빈 자리에 떨어졌던 낙엽이 아직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이 달라졌다. 먹빛에서 남색으로. 별이 하나씩 사라졌다. 새가 울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꺼졌다.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온다는 것이 —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5장: 서리
벤치에 서리가 내렸다.
유진은 그 앞에 서서 잠깐 봤다. 벤치 표면이 하얬다. 새벽 가로등 빛에 반사돼서 조금 빛났다. 앉으면 젖을 것이었다.
그냥 앉았다.
차가웠다. 외투 두께로도 느껴졌다. 가을에는 없던 차가움이었다. 유진은 그것을 느끼면서 손을 장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 처음으로 장갑을 꺼냈다. 서랍 안에 있던 것. 꺼내면서 그 안에서 지폐가 하나 나왔다. 만 원짜리. 거기 있던 줄 몰랐던 것이다. 거기 있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늘을 봤다.
별이 있었다. 12월이 시작됐는데도 별은 그대로였다. 가을보다 오히려 많아 보였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차갑고 건조한 공기. 호흡하면 찬 것이 코를 지나 폐까지 내려갔다. 잠깐 잡히는 느낌이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아직 안 왔다. 유진은 그것을 인식하고, 인식한 자신을 인식했다. 이상한 순서였다. 보통은 왔다는 것을 먼저 알았다 — 발소리, 그림자, 고개를 숙이는 것. 안 왔다는 것을 먼저 아는 건 —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온 지 얼마 됐는지도 몰랐다.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새벽 5시인지 5시 반인지 몰랐다.
찬 공기가 뺨을 지나갔다.
12월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달력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 몸으로 느끼는 12월이 오늘 처음이었다. 가을은 길었다. 10월, 11월 — 천천히 추워졌다. 12월은 달랐다. 공기에 결이 있었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차가움.
지난 12월을 생각했다.
생각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지난 12월에 그 사람이랑 — 어딜 갔었는지. 12월은 어떤 냄새였는지. 뭘 먹었는지. 유진은 호흡을 한 번 했다.
오지 않아도 됐다.
지금 여기 있었다. 서리 내린 벤치가 있었다. 별이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 있는 것들이었다.
산책로에서 소리가 났다.
발소리였다. 운동화 밑창이 마른 땅을 밟는 소리 — 낙엽이 없었다. 이제 다 내렸으니까. 맨 땅 소리였다. 가까워졌다.
남자였다.
패딩이 바뀌었다. 얇은 것에서 두꺼운 것으로.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목도리가 있었다. 가로등 빛 안으로 들어오면서 유진을 봤다. 고개를 숙였다.
유진도 숙였다.
남자가 왼쪽 끝에 앉았다. 서리 내린 벤치에. 옆이 차가울 텐데 — 그냥 앉았다. 유진도 그냥 앉은 것처럼.
침묵이었다.
하늘을 봤다. 유진이. 남자도 어딘가를 봤다. 유진은 남자가 무엇을 보는지 몰랐다. 별을 보는지, 나무를 보는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지.
벤치 표면의 서리가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사이에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가로등 빛에 조금씩 녹을 것이었다. 아니면 날이 밝아지면서 녹을 것이었다. 지금은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목도리를 해도 귀가 차가웠다. 유진은 장갑 낀 손으로 귀를 잠깐 감쌌다가 내렸다. 귀마개를 챙겨야 했다. 내일은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도 나온다는 전제로 생각한 것이었다.
유진은 그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5년 동안 — 아침마다 그 사람 생각이 먼저 났다. 깨는 순간부터. 오늘은 뭘 먹을지, 오늘 저녁에 뭘 할지, 이번 주말에 어딜 갈지. 그게 아침의 순서였다. 이제 그 순서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 공백이 있었다. 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새벽에 나오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잠이 안 와서였다. 그냥 방에 있기가 — 어두운 방 천장을 보고 있기가 더 힘들어서. 여기 오면 적어도 공기가 있었다. 별이 있었다. 추위가 있었다. 방 안에는 없던 것들.
별 하나가 사라졌다.
구름이 지나간 것이었다. 또 사라졌다. 유진은 그것을 봤다. 하늘에 구름이 오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오늘은 안녕히 계세요라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 남자가 먼저 가는 것 같았다. 유진은 앉아서 그것을 봤다. 남자도 먼저 갈 때가 있었다.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유진이 항상 먼저 가는 게 규칙인 건 아니었다. 출근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남자가 먼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남자가 아직 있었다.
서리 내린 벤치 위, 왼쪽 끝에. 유진은 오른쪽 끝에. 두 사람 사이에 빈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도 서리가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
별들이 하나씩 구름 뒤로 사라졌다. 전부 사라지지는 않았다. 구름 사이로 보였다. 하늘이 달라졌다. 검은색에서 조금 더 어두운 파란색으로. 아직 여명이 아니었다. 12월 새벽은 해가 늦게 떴다.
새가 울었다.
어디선가. 가까운 곳. 한 번 울고 멈추고, 또 한 번 울고. 유진은 그 소리를 들었다. 겨울에도 새가 있었다. 이 공원에 사는 새였다. 새벽부터 깨어있는 새.
일어설 시간이었다.
유진은 그것을 알았다. 몸으로 알았다.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샤워하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그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일어섰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남자 쪽을 봤다.
남자가 정면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벤치 위의 서리를. 아니면 아무것도.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산책로로 발을 내딛었다.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 서리가 살짝 얼어 있던 풀잎을 밟은 소리였다. 마른 소리. 12월의 소리.
걸었다.
아치 문을 향해. 가로등 빛을 지나고, 어둠을 지나고. 어딘가에서 그 새가 또 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원 밖으로 나오면서 — 서리 내린 벤치가 머릿속에 잠깐 남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빈 자리.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에 서리가 내려 있던 것.
오늘은 닦지 않았다.
그냥 앉았다.
6장: 보온병
편의점 유리문 앞에서 준혁이 멈췄다.
안에 불이 밝았다. 새벽 4시 50분. 계산대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음료 냉장고가 보였다. 캔들이 줄지어 있었다. 커피, 음료, 에너지드링크.
발이 들어갔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냥 들어가 있었다. 냉장고 앞에 서서 한참 봤다. 손이 캔커피를 집었다. 하나. 멈췄다. 다시 하나를 더 집었다.
계산했다.
“두 개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닐봉지 없이 받았다. 손바닥 안에 캔커피 두 개.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다시 얼굴을 쳤다.
걸어갔다.
벤치에 여자가 있었다.
오늘도 머플러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손을 소매 속에 접어 넣고, 몸을 조금 웅크린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이 많은 날이었다. 공기가 건조하고 차가웠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가로등 불빛 속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바람이 왔다.
여자의 머플러 끝이 흔들렸다. 준혁은 그것을 봤다. 며칠째 보고 있었다.
준혁이 왼쪽 끝에 앉았다.
자기 자리였다.
손에 캔커피 두 개가 있었다. 따뜻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차갑게 나온 것이었다. 준혁은 한참 앉아 있다가 — 손을 내밀어 여자 쪽 끝 벤치 위에 캔 하나를 놓았다. 소리가 났다. 금속이 나무에 닿는 소리. 말이 없었다.
여자가 봤다.
캔을 봤다. 준혁을 봤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들었다.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운 캔이었다. 준혁은 자기 것을 열었다. 마셨다. 차가웠다. 목 안으로 차가운 것이 내려갔다.
아무 말 없었다.
하늘을 봤다. 별들이 있었다. 바람이 또 왔다. 이번엔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벤치 위 빈 자리를.
여자가 캔을 마셨다. 한 모금. 그리고 양손에 다시 감쌌다.
새가 울었다. 어딘가에서.
한 번. 멈춤. 또 한 번.
준혁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하늘을 봤다. 겨울 별들이 선명했다.
여자가 일어섰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준혁을 보지 않았다. 캔커피를 벤치 끝에 내려놓았다 — 비어 있었다. 고개를 숙였다. 준혁이 숙였다. 여자가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아치 문 쪽으로.
발소리가 멀어졌다.
준혁은 남았다. 자기 자리에.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 밝아지려면 한참이었다.
빈 캔이 벤치 끝에 있었다.
바람이 왔다. 캔이 조금 움직였다. 준혁은 손을 뻗어 캔을 잡았다. 떨어지지 않게. 그 상태로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가방이 오늘 컸다. 뭔가 더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준혁이 앉으면서 봤다 — 그냥 무게가 달라 보였다. 여자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침묵이었다.
바람이 없는 날이었다. 공기가 차갑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별들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벤치 위를 노랗게 덮고 있었다.
여자가 가방에 손을 넣었다.
보온병이 나왔다. 검은색. 뚜껑을 열었다. 김이 올랐다. 하얗게, 새벽 공기 속으로. 뚜껑에 차를 따랐다. 뚜껑이 컵이 됐다. 손으로 잠깐 감싸더니 — 준혁 쪽 끝 벤치 위에 놓았다.
손이 잠깐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돌아갔다.
준혁은 보온병 뚜껑을 봤다. 김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따뜻했다. 손이 가서 들었다. 두 손으로. 따뜻했다. 얼어 있던 손바닥으로 온기가 번졌다. 마셨다. 목 안으로 따뜻한 것이 내려갔다.
차 맛이 났다. 어떤 차인지 몰랐다. 따뜻했다.
바람이 없어서인지 김이 한참 갔다.
준혁은 그 김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천천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여자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벤치 끝에서 끝으로.
김처럼, 열처럼.
7장: 온기
집에 돌아와서 씻고, 밥을 먹고, 출근 가방을 쌌다.
그러다 멈췄다.
부엌 서랍 안에 보온병이 있었다. 작년에 산 것이다. 한두 번 쓰고 그대로 둔 것. 유진은 그걸 꺼내서 한참 들고 있었다. 왜 꺼냈는지 모른다. 꺼내져 있었다.
물을 끓였다. 티백이 있었다 — 카모마일. 선물받은 것. 상자에 열다섯 개가 남아있었다. 우렸다. 따뜻한 것이 보온병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
가방에 넣으면 무게가 달라졌다.
출근하는 내내 그 무게를 느꼈다. 지하철 안, 사람들 사이에서. 가방이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달랐다. 안에 뭔가 있다는 느낌. 유진은 그것을 내내 알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생각했다.
오늘 안 나가도 된다.
꼭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없다. 잠이 와서 못 나갈 수도 있다. 날이 더 추워질 수도 있다. 비가 올 수도 있다. 이유는 많다.
그냥 자면 된다.
보온병은 다음에 써도 된다. 카모마일이 열다섯 개나 있다. 혼자 마셔도 되고, 회사에 가져가도 된다.
유진은 씻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천장을 봤다. 방이 조용했다. 창밖에서 차 소리가 가끔 났다. 겨울 새벽에는 차도 없었다. 점점 조용해졌다.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왔다. 그냥 있었다.
4시 45분.
유진이 일어났다. 알람이 아니었다. 몸이 일어났다.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차가웠다 — 12월 바닥. 장갑을 챙기고, 머플러를 챙겼다.
보온병이 선반에 있었다.
전날 밤에 씻어서 말려놓은 것이었다. 유진은 그걸 봤다. 다시 물을 끓였다. 카모마일. 보온병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것이 잠겼다.
가방에 넣었다.
무게가 다시 달라졌다.
벤치에 먼저 왔다.
남자가 없었다. 유진은 앉았다. 가방을 옆에 내렸다. 하늘이 어두웠다. 별이 많았다. 어제보다 맑았다. 공기가 아주 차가웠다 — 입김이 빠르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손이 차가웠다. 장갑을 꼈는데도.
발소리가 들렸다.
산책로에서. 운동화 밑창 소리. 가까워졌다. 남자가 가로등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유진을 봤다. 고개를 숙였다.
유진도 숙였다.
남자가 왼쪽 끝에 앉았다.
침묵이었다.
유진은 가방에 손을 넣었다. 보온병이 손에 닿았다. 아직 따뜻했다. 꺼냈다. 뚜껑을 열었다. 김이 올랐다 — 하얗게, 새벽 공기 속으로. 어둠 안에서 김이 선명했다.
뚜껑에 차를 따랐다.
뚜껑이 컵이 됐다. 유진은 잠깐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뜨겁지 않았다. 마실 수 있는 온도. 그걸 확인하고 — 남자 쪽 끝 벤치 위에 놓았다.
손이 잠깐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돌아왔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남자도 말하지 않았다. 유진은 보온병을 무릎 위에 올렸다. 따뜻했다. 손이 무릎 위의 보온병을 감싸고 있었다.
남자가 뚜껑을 들었다.
두 손으로. 유진은 그걸 보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들이었다. 소리가 났다 — 차를 마시는 소리. 작았다. 유진은 그걸 들었다.
들렸다.
바람이 왔다. 오늘은 조용한 바람이었다. 나뭇가지를 흔들지 않았다. 그냥 지나갔다. 두 사람 사이를. 벤치 위 빈 자리를.
새가 울었다.
어제도 울던 새였다.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멈춤, 한 번. 유진은 그 소리를 들었다. 겨울에도 새는 운다. 이 공원 새벽을 채우는 소리.
남자가 뚜껑을 벤치 끝에 내려놓았다.
빈 뚜껑이었다. 다 마셨다. 유진은 그걸 봤다 —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시야 끝에서. 빈 뚜껑. 김이 없었다. 차가워진 것이었다.
잠깐이다. 그 순간이.
남자가 뚜껑을 들어서 보온병 위에 얹었다. 뚜껑을 닫듯이. 소리가 났다 — 금속이 금속에 닿는 소리. 가벼웠다.
유진이 받았다.
손이 가서 보온병을 가방에 넣었다. 남자를 보지 않았다. 하늘을 봤다. 별들이 있었다. 구름이 하나도 없는 밤이었다. 선명했다, 겨울의 별들이.
시간이 지났다.
일어설 시간이었다. 알았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남자 쪽을 봤다. 남자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 12월의 마른 소리. 아치 문 쪽으로. 가로등 빛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공원 밖으로 나오면서.
가방 안에 보온병이 있었다. 아까보다 가벼웠다. 차를 다 따랐으니까. 하지만 아직 따뜻했다 — 유진의 등 쪽으로, 가방을 통해서. 차가운 새벽에, 등이 조금 따뜻했다.
유진은 걸었다.
그것만 느끼면서.
8장: 이력서
이력서를 열었다.
3개월 만이었다. 파일이 그대로 있었다. 저장한 날짜 — 10월 3일. 퇴사하기 나흘 전. 준혁은 그것을 보고 닫으려다 멈췄다.
열었다.
빈칸이 있었다.
“저는 __한 사람입니다.”
회사 소개서에서 복사한 형식이었다. 작년에 쓰던 방식. 그때는 뭘 썼더라. 기억이 안 났다. 빈칸이 그냥 비어 있었다.
20분이 지났다.
창 밖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겨울 바람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가 보였다 — 새벽이 아니라 오후. 겨울 오후의 거리는 빨리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후드를 쓰고, 빠르게. 다들 어딘가를 향해 갔다.
준혁은 닫았다.
도윤에게서 카톡이 왔다.
“야, 너 코딩 잘하잖아. 여기 괜찮은 데 있어.”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준혁은 열지 않았다.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
한참 뒤에 도윤이 답했다.
“코딩 잘하잖아.”
“코딩 말고.”
읽음 표시가 생겼다. 도윤이 멈췄다. 준혁도 멈췄다. 이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통장을 확인했다.
숫자가 있었다. 줄어들고 있는 숫자. 계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봤다. 불안이 오는 방향은 알고 있었다. 식비, 관리비, 핸드폰 요금. 매달 같은 순서로, 같은 자리에서 줄어들었다.
불안은 왔다. 그러나 불안도 3개월이면 피곤해졌다. 뾰족했던 것이 둥글어졌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 날카롭게 베는 것이 아니라 무겁게 누르는 쪽으로 달라졌다.
준혁은 오래 앉아 있었다.
새벽에 나갔다.
찬 공기가 얼굴을 쳤다. 겨울이 가장 깊어진 새벽이었다. 1월의 가장 추운 시간 — 해가 뜨기까지 아직 멀었고, 밤이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숨을 쉬면 입김이 나왔다. 두껍고 선명했다. 공원 산책로의 나뭇가지들이 가로등 불빛 아래 굳어 있었다. 잎이 없는 겨울 가지는 흑백 사진처럼 선명했다 — 주변이 어두울수록 빛은 더 뚜렷해졌다.
벤치에 여자가 있었다.
오늘은 뭔가를 읽고 있었다. 가방에서 꺼낸 종이 묶음 — 원고였다. 편의점 봉투에 넣어 온 것. 가로등 불빛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오른손에 형광펜이 있었다.
준혁이 왼쪽 끝에 앉았다.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준혁도 숙였다.
여자의 형광펜이 움직였다.
느리지 않았다. 멈추지 않았다. 한 줄을 읽고, 다음 줄로 가고, 다시 위로 올라가고, 그 문장에 펜이 닿고. 리듬이 있었다. 읽는 것인지 다듬는 것인지 — 둘 다인 것 같았다. 종이 위에서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거기 무언가가 있었다.
바람이 왔다. 오늘은 소리 없는 바람이었다. 나뭇가지를 흔들지 않았다. 벤치 앞을 가로질러 갔다. 여자의 종이 묶음 모서리가 조금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여자의 손이 잠깐 그 위를 눌렀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준혁은 그 손을 보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멈추지 않는 손. 무언가를 계속 하는 손. 원래 거기 있는 것처럼 — 그 손은 오늘도 거기 있었다.
자기 손을 내려봤다.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장갑을 낀 손. 오늘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손.
그 생각이 왔을 때, 자책이 오지 않았다. 이전에는 왔다. 3개월 동안, 매일. 아무것도 안 한 하루의 끝에는 반드시 왔다. 그런데 지금은 — 손이 거기 놓여 있었다. 자기 손인데,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여자의 형광펜이 한 줄에서 멈췄다.
오래 멈춰 있었다. 그 줄이 뭔지 준혁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그 줄을 오래 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펜 끝이 종이에 닿은 채로.
준혁은 시선을 거뒀다.
하늘을 봤다.
겨울 하늘이었다. 구름이 없었다. 별이 많았다 — 1월의 별은 다른 계절보다 선명했다. 공기가 건조하고 맑아서. 오리온이 보였다. 그 옆에 이름 모르는 것들이 가득했다.
여자가 형광펜 뚜껑을 닫는 소리가 났다.
딸깍.
준혁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새가 울었다.
이 공원 새벽의 새였다. 겨울에도 울었다. 한 번, 멈춤, 한 번. 같은 자리에서. 준혁은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겨울 새벽에 새가 있다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이 공원의 이 새벽에는 이 새가 울었다.
여자가 종이 묶음을 가방에 넣었다.
안을 볼 수 없었다. 여자가 무엇을 읽었는지, 어느 줄에서 멈췄는지, 그게 어떤 이야기였는지. 하지만 그 손이 거기서 멈췄다 — 멈출 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또 한 번 벤치 앞을 지나갔다.
여자가 일어섰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준혁 쪽을 봤다. 준혁이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걸어갔다.
산책로를 따라. 발자국 소리가 선명했다 — 오늘 밤이 그만큼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가로등 불빛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아치 문 쪽으로. 공원 밖으로.
준혁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별들이 있었다. 하늘에 가득. 여자는 이것을 몰랐다. 출근이니까. 지금쯤 공원 밖이었다. 지하철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 그 손이 어느 줄에서 멈췄는지 들고 가고 있을 것이었다.
빈칸이 생각났다.
이력서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냥 빈칸.
차가운 공기가 왔다. 별들이 그대로 있었다.
준혁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9장: 빈 벤치
벤치가 비어 있었다.
유진은 산책로 끝에서 멈췄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벤치 위를 노랗게 덮고 있었다. 왼쪽 끝이 비어 있었다. 남자의 자리.
2월 마지막 주였다.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겨울과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 아직 차가웠지만, 1월의 그 뼈를 깎는 차가움이 아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벤치 표면이 보였다. 서리도 없었다.
유진은 걸었다.
벤치에 앉았다. 오른쪽 끝, 자기 자리에. 어깨에서 가방을 내렸다. 보온병이 있었다. 아침에 나서기 전에 끓여 담아온 것. 습관이 됐다. 언제부터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보온병을 꺼내지 않았다.
하늘을 봤다. 별이 있었다. 2월 새벽에는 이른 봄 별자리가 동쪽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겨울 별들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진은 별의 이름을 몰랐다. 그냥 있다는 것만 알았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
발소리가 없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하늘을 봤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지나갔다.
시간이 지났다.
유진은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몇 시인지 몰랐다. 모르는 채로 앉아 있었다. 별이 있었다. 가로등이 있었다. 바람이 가끔 왔다.
왼쪽 끝이 비어 있었다.
그냥 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알 방법이 없었다. 유진은 그것을 알았다 —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름도 몰랐다.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방법이 없었다.
바람이 왔다. 유진의 머플러 끝이 흔들렸다.
새가 울었다. 어딘가에서. 이 공원의 새벽 새였다. 겨울 내내 울었던. 한 번, 멈춤, 한 번. 유진은 그 소리를 들었다. 새는 오늘도 있었다.
일어설 시간이 됐다.
몸이 알았다. 출근이 있으니까. 샤워하고 밥을 먹고 옷을 입어야 한다. 유진은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보온병이 아직 안에 있었다. 오늘 따른 적이 없었다.
왼쪽 끝을 한 번 봤다.
비어 있었다.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아치 문을 지나. 공원 밖으로.
하루가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게 이상했다. 이유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이상한 것이. 회사에 앉아서 원고를 읽는데 눈이 잘 가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퇴근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쥐고 서 있으면서, 유진은 그 감각이 떠올랐다.
빈 벤치.
5년 사귄 사람이 옆에 없는 것은 알았다. 그건 이미 두 달이 지났다. 잘 때 습관처럼 옆을 보는 것, 아침에 눈 뜨면 생기는 공백 — 그것들은 알고 있는 빈자리였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오늘의 이것은 달랐다.
어디에 있는지도, 무슨 일인지도 몰랐다. 이름조차 없었다. 그런데 — 뭔가가 없었다. 하루 내내, 어딘가에 뭔가가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유진은 이름 붙이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유진은 아치 문 앞에서 잠깐 섰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그냥 들어가면 됐는데.
들어갔다.
벤치에 남자가 있었다.
왼쪽 끝에.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하고. 평소처럼.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유진은 묻지 않았다. 남자가 유진을 봤다. 고개를 숙였다. 유진도 숙였다.
앉았다.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었다. 김이 올랐다. 유진은 뚜껑에 차를 따랐다. 천천히. 뚜껑이 가득 찼다. 유진은 뚜껑을 남자 쪽 끝 벤치 위에 놓았다. 평소처럼. 말 없이.
손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집어 차를 따랐다. 이번엔 자기 것.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바람이 없는 날이었다. 김이 한참 올라갔다.
하늘을 봤다. 별이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별들이었다. 아니면 조금 달라진 별들이었다. 유진은 몰랐다.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있었다. 오늘도 거기 있었다.
새가 울었다.
이 공원의 새였다. 한 번, 멈춤, 한 번.
차가 식기 전에 마셨다. 따뜻했다. 입 안에서 온기가 퍼졌다. 유진은 그것을 느끼면서 — 벤치 끝을 보지 않았다.
봐도 됐는데. 보지 않았다.
남자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
10장: 벚꽃
합격이 됐는지 아직 모른다.
어제 면접을 봤다. 작은 회사다. 직원 열두 명. 공유 오피스 한 층. 들어가니 에스프레소 냄새가 났다. 면접관이 세 명이었고, 그 중 한 명은 준혁보다 어려 보였다.
“왜 여기 지원하셨어요?”
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코딩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설명 읽으면서 — 이 사람들이 뭘 만들려는지 보여서요.”
“잘 모르는 건 배우면 됩니다.”
면접관 중 한 명이 한 말이다. 준혁이 잘 모르는 기술 스택 얘기가 나왔을 때. 배우면 됩니다. 준혁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3개월 동안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빨리 돌아와야지, 좋은 조건이 있어, 너 잘 할 수 있어 — 이런 말들만 있었다. 배우면 됩니다는 달랐다.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결과는 내일이나 모레 연락이 온다고 했다.
새벽에 나왔다.
공원 입구에서 멈췄다. 아치 문 너머로 — 달랐다.
가지가 달랐다. 어제까지도 맨가지였는데. 오늘 새벽, 가로등 불빛 아래 — 분홍빛이 붙어 있다. 봄이 하룻밤 사이에 온 것이다. 아직 꽃이 피었다고 하기엔 이르다 — 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지마다 조금씩.
준혁은 걷는다.
발걸음이 평소와 다른 것을 느낀다. 무겁지 않다. 이유를 모른다. 면접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 발이 가볍다.
겨울이 아직 공기 안에 있다. 차갑다. 그런데 꽃 냄새가 섞여 있다. 이 두 가지가 같은 공기 안에 있다. 준혁은 숨을 마신다. 차갑고 꽃 냄새가 난다. 이상한 조합이다. 나쁘지 않다.
벤치에 여자가 있다.
오늘도.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하늘을 보고 있다. 가로등 불빛이 벤치 위에 닿아 있다. 벚나무 가지가 그 불빛 안에 들어와 있다. 분홍빛이 노란 불빛을 받아 조금 달라진다.
준혁이 왼쪽 끝에 앉는다.
고개를 숙인다. 여자가 숙인다.
침묵.
바람이 없다. 오늘은 바람이 없는 날이다. 공원이 조용하다. 낙엽도 없다 — 봄이니까. 새 잎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가지가 맨가지이거나, 꽃봉오리가 붙어 있거나. 중간이 없다.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아직 피지도 않은 것이 떨어지는 것이다 — 봉오리째. 바람 없이. 그냥 무게를 못 이겨서. 가로등 불빛 안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노란 빛을 받으면서.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간다.
벤치 앞 땅에 닿는다. 소리 없이.
준혁은 그걸 본다. 여자도 본다.
침묵이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침묵이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본 뒤의 침묵.
준혁은 말한다.
목소리가 나올 때, 자신도 몰랐다. 나올 것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예쁘네요. 꽃.”
꽃한테 하는 말 같았다. 여자한테 한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나왔다. 날씨 얘기도 한 적 없다. “안녕하세요” 밖으로 나온 첫 말.
여자는 꽃잎을 본다.
땅에 떨어진 것을 본다. 준혁을 보는 게 아니다. 꽃잎을 본다. 오래.
준혁도 꽃잎을 본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
바람이 없어서 꽃잎이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여자가 말한다.
준혁에게 하는 것인지, 꽃잎에게 하는 것인지, 아무에게도 하는 것이 아닌지 —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봄에 헤어졌었어요. 작년에.”
그것뿐이다.
준혁은 무릎 위의 손을 본다. 장갑을 낀 손. 꽃잎이 땅에 있다. 그것도 본다. 고개를 들지 않는다. 공기가 조금 바뀐 것 같다 — 아닐 수도 있다. 모르겠다.
봄 새벽의 침묵이다. 가로등이 켜져 있다. 어딘가에서 새가 한 번 운다 — 겨울 내내 울던 새가 아닌 것 같다. 소리가 다르다. 봄 새다. 준혁이 처음 듣는 소리.
여자가 일어선다.
오늘도 먼저. 가방을 어깨에 건다. 고개를 숙인다. 준혁이 숙인다.
걸어간다.
산책로를 따라. 가로등 불빛 안에서 벚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꽃봉오리가 달린 가지 아래를. 여자의 어깨 위로 분홍빛 가지가 지나간다.
아치 문 밖으로.
준혁은 남는다. 오늘도. 그 자리에.
봄 새벽이다. 겨울보다 빨리 밝아오는 하늘. 먹빛에서 남색으로 가는 속도가 다르다. 준혁은 그것을 느낀다. 해가 일찍 뜨기 시작했다. 어둠이 짧아지고 있다.
봄에 헤어졌었어요, 작년에.
준혁은 그 말을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 그냥 공기 안에 있다. 꽃 냄새처럼.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있다.
무릎 위에 손을 놓는다. 장갑을 낀 손.
꽃잎이 하나 더 떨어진다. 이번엔 어깨 위로. 준혁의 어깨. 닿는 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다. 그냥 있다가, 바람이 없으니 그대로 있다.
하늘이 밝아진다.
준혁은 그걸 본다. 어둠이 걷히면서 나무들의 윤곽이 나온다. 겨울 내내 검은 뼈대만 있던 가지들에 오늘은 조금씩 분홍빛이 있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꽃들. 피기 직전의 것들.
면접 결과가 오면 — 어떤 쪽이든 — 내일도 여기 올 것이다.
준혁은 그걸 안다. 오늘 처음으로.
11장: 노트
벚꽃이 지고 있었다.
가지마다 붙어 있던 분홍빛이 하나씩, 바람도 없는 날에 그냥 무게를 못 이겨 떨어졌다. 꽃잎이 아니라 봉오리째로. 어떤 것은 산책로에, 어떤 것은 벤치 앞 흙 위에, 어떤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곳에 내려앉기를 기다리듯 공기 중에 있다가 사라졌다.
4월 초였다.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 차갑지 않았다. 새벽에 장갑을 끼지 않았다. 머플러도 가방에 있었다. 꺼낼 필요가 없어서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쓰지 않았다. 외투도 얇아졌다.
보온병은 오늘 가져오지 않았다.
아침에 나서면서 끓이려다 멈췄다. 봄이었다. 따뜻한 것을 들고 나갈 이유가 없었다. 습관이 멈추는 데는 한 번의 결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 그냥, 필요 없어졌다. 가방이 가벼웠다.
벤치에 앉았다.
공원이 달라졌다. 벚꽃이 지는 자리에 연두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지 끝마다 작은 잎들이. 아직 다 펴지지 않은 것들. 새벽이지만 가로등이 없어도 조금은 보였다 — 하늘이 밝아지는 속도가 달라졌다.
새소리가 있었다.
겨울 내내 들었던 새와 다른 소리였다. 톤이 높았다. 빨랐다. 봄새의 소리였다. 겨울 새는 한 번, 멈춤, 한 번 — 이 봄새는 연달아 울었다. 여러 방향에서. 유진은 앉아서 그 소리를 들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봄이니까.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노트였다. A5 크기, 표지가 크림색. 출판사에서 샘플로 받아둔 것 — 신간 기념 굿즈. 출간일에 작가에게 보내려고 찍어둔 것의 남은 것. 책상 서랍에 있던 것. 한 번도 펴지 않은 것.
유진은 그것을 가방에서 꺼냈다.
손 안에서 잠깐 봤다.
크림색 표지. 옆에 엷은 봉오리 그림이 있었다. 줄이 쳐진 속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 처음 쓰는 손의 무게를 기다리는 것.
유진은 그것을 — 벤치 끝에 놓았다.
남자가 앉는 자리 끝. 벤치 표면 위에. 소리 없이.
일어섰다.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샤워하고, 밥을 먹고. 늘 하는 순서.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산책로로 발을 내딛었다.
걸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 발목 언저리쯤에 있었다.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진은 그것을 느끼면서, 걸었다. 한 발 더. 한 발 더.
그냥 두고 온 것이었다. 가방이 가벼워진 이유. 그것뿐이었다.
걸었다. 봄새가 울었다. 벚꽃 잎이 어깨 위로 지나갔다. 연두색 잎들이 가지 끝에서 흔들렸다. 공원이 어제보다 밝았다. 해가 일찍 뜨기 시작했다. 유진이 여기 있는 시간 동안 이미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아치 문을 지났다.
공원 밖으로.
걸어가면서.
왜 노트인지 유진 자신도 몰랐다. 물건이 있었다. 책상 서랍에. 어제부터 왠지 거기 있었다 — 다음 날도 있었다. 그게 손을 움직였다.
골목을 지났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빵집이 문을 열지 않았다.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유진은 그 뒤로 남은 소리를 들으면서 걸었다.
이틀 전, 벚꽃잎이 떨어지던 자리. 꽃잎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목소리가 있었다.
유진도 그날 말했다. 봄에 헤어졌었어요, 작년에.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냥 나왔다. 벚꽃이 내려오는 것을 보다가. 꽃잎이 땅에 닿는 것을 보다가.
회사에 앉아서 원고를 펼쳤다.
오늘 마감이 있는 것. 13만 자. 4챕터가 남았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수정할 문장. 바꿀 단어. 이 작가는 감정 설명이 많았다 — 장면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설명했다. 유진은 그것을 지웠다. 장면을 살렸다.
오전이 갔다.
점심이 왔다.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었다. 회사 동료가 “어제 어땠어요, 요즘”이라고 물었다. 유진은 “잘 지내요”라고 답했다. 그것이 맞는 말이었다.
오후가 왔다.
원고로 돌아왔다. 4챕터를 다듬었다. 3챕터가 끝났다. 2챕터가 끝났다.
유진은 일하는 동안 노트를 생각하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 있던 노트가 이제 공원 벤치 끝에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쥐었다. 열차가 흔들렸다.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하루를 들고 돌아가는 사람들. 유진은 그 안에 있었다. 흔들리면서.
내일 새벽 벤치에 나갈 것이다.
노트가 있을지 없을지 — 몰랐다. 가져갔을 수도 있고, 그냥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비가 왔거나 다른 사람이 건드렸거나. 유진은 그것을 미리 알 수 없었다.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게, 괜찮았다.
내일 벤치에 가서 보면 됐다. 지금은 지하철이 흔들리고 있었고, 창밖에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있는 것들이었다.
봄새가 울고 있었다, 아까. 겨울 내내 없던 소리가.
12장: 이름
합격이었다.
어제 오후 4시에 연락이 왔다. 준혁은 핸드폰을 보다가 잠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창밖을 봤다. 봄 오후의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튼을 걷어둔 자리로. 오래간만이었다 — 커튼을 걷어둔 것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이다.
새벽에 공원에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 지금 회사보다 출근이 이른 곳이면 더 어렵다. 8시 반 출근. 준혁은 계산해봤다 — 새벽 5시에 나가면 6시 반까지는 공원에 있을 수 있다.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새벽과 같은 것인지는 모른다.
새벽에 나왔다.
4월이 깊었다. 벚꽃이 졌다. 꽃 대신 잎이 나왔다. 연두색.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는 그 색이 희미하지만 — 낮에 이 공원을 지나가면 빽빽한 초록이다. 계절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었다.
공원에 들어서면서 준혁은 알았다.
오늘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이유를 몰랐다. 어제 합격 연락이 와서가 아니었다. 그냥 — 오늘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새벽부터 있었다. 나서면서도 있었고, 걸으면서도 있었다. 아치 문을 지날 때 아직도 있었다.
벤치에 여자가 있었다.
오늘도.
준혁은 왼쪽 끝에 앉았다.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숙였다.
침묵이었다.
새소리가 있었다. 봄새. 이제 겨울 새보다 이 새 소리가 더 익숙했다. 가지 위에 잎이 흔들렸다. 바람이 가끔 왔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동쪽 하늘이 —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아직 여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먹빛에서 아주 조금씩, 남색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준혁은 그것을 오늘따라 선명하게 봤다.
겨울 내내 이 시간에 앉아 있었다. 하늘이 밝아지는 것을 봤다. 별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어둠이 색을 바꾸는 것을. 여자는 항상 그 전에 일어섰다. 여자가 가고 나면 준혁 혼자 남아서 하늘이 완전히 밝아오는 것을 봤다.
오늘은 먼저 일어서야 할 것 같다.
그것도 새벽부터 알고 있었다. 오늘은 먼저 일어서야 한다.
시간이 지났다.
침묵이 계속됐다.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가 울었다. 동쪽이 조금 더 달라졌다.
준혁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장갑이 없었다. 봄이니까. 손이 그냥 무릎 위에 있었다. 맨손이.
일어섰다.
앉아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준혁은 일어서면서 — 여자 쪽을 봤다. 처음으로, 이렇게.
여자가 멈췄다.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던 것 같았다. 가방을 집으려던 손이 그 자리에 있었다. 준혁을 봤다.
둘이 선 것이 아니었다. 준혁이 서 있고, 여자가 앉아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 처음이었다.
이 새벽들 중에서, 준혁이 먼저 일어선 것은.
동쪽 하늘이 달라졌다.
먹빛이 남색이 됐다. 남색이 보랏빛 쪽으로 기울었다. 아직 선명하지 않았다 — 그런데 기울고 있었다. 가로등 빛 바깥의 하늘이 다른 빛을 품기 시작했다. 어둠이 물러나는 것이었다.
준혁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여자를 봤다.
“저, 다음 주부터 회사를 다녀요.”
목소리가 나왔다. 나올 것을 알았는데도 — 막상 나오니까 공기 속에서 따로 있는 것 같다.
여자가 준혁을 봤다. 잠깐. 그리고.
“잘됐네요.”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두 마디가 — 잘됐네요 — 비어 있지 않았다.
“당신도 출근해야 하잖아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섰다.
둘이 서 있었다.
처음이었다. 일어섰는데 아무도 걷지 않았다. 준혁도, 여자도. 벤치와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계절 내내 여자와 준혁 사이에 벤치 위의 빈 자리가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 서리가 내렸고, 캔커피가 놓였고, 보온병이 놓였고, 노트가 놓였던 자리. 지금 그 자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동쪽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가로등 빛과 다른 빛이었다. 더 넓고, 더 희미하고, 더 낮은 곳에서 오는 빛. 나무 윗가지들이 그 빛을 받기 시작했다. 연두색 잎들이 분홍빛 안에서 조금씩 색을 내기 시작했다.
겨울 내내 없었던 빛이었다.
어딘가에서 새가 울었다. 봄새의 소리. 맑고 빠른 소리.
“유진이에요. 이름.”
나올 것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그냥 나왔다. 공기 속에 있었다.
준혁은 그것을 들었다.
유진.
“준혁이요.”
대답이 나왔다. 이것도 준비한 게 아니었다. 서로를 부를 이름이 생겼다. 아직 부르지 않았지만 — 이제 있었다.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가로등이 아직 켜져 있었다. 두 빛이 같은 벤치 위에 닿았다. 오늘 처음 생긴 조합이었다.
연두색 잎 사이로 빛이 통과했다.
봄새가 울었다. 가까운 곳에서. 짧고 빠른 소리로.
준혁이 걷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여자보다 먼저.
한 걸음, 두 걸음. 산책로로. 가로등 빛 바깥으로. 아치 문 쪽으로.
그리고 여자도 걷기 시작했다.
같은 방향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벤치를 떠났다.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아치 문을 향해. 가로등 불빛 안에서, 그 바깥으로, 연두색 잎들 아래를 지나. 여명이 오는 하늘 아래.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 이름을 알았다. 아직 부르지 않았다. 부르지 않아도 됐다. 알고 있으니까.
아치 문이 보였다.
두 사람이 그것을 향해 걸었다. 겨울 내내 새벽마다 이 공원에 있었으면서, 처음으로, 나란히.
에필로그: 황혼 — 다음 가을
퇴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골목을 걷고 있었다. 집 방향이었다. 매일 걷는 길이었다. 유진은 이어폰을 하나 빼고 걸었다. 가을이라는 것을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 공기가 달라졌다. 여름 내내 있던 것들이 빠져나가고, 이 결이 생긴 것. 손등으로 느껴지는 차가움.
공원 앞을 지나가다 발이 멈췄다.
이유는 없었다. 가방이 무거웠는데, 그냥. 멈췄다. 아치 문 앞에. 안을 봤다. 가을 저녁의 공원이 있었다. 산책로 위에 낙엽이 있었다. 아직 다 지지 않은 것들이 가지에 붙어 있었다. 빛이 기울어 나뭇잎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발이 들어갔다.
벤치에 앉았다.
처음이었다. 아침이 아닌 시간에.
황혼이었다. 서쪽이 주황빛이었다. 나뭇잎들이 그 빛을 받아 타오르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을 낙엽 냄새. 바람이 오면 잎이 흔들리고, 그 소리가 났다. 어딘가 낙엽 하나가 구르는 소리도.
유진은 앉아서 그것을 봤다.
회사에서 오늘 원고를 읽었다. 새로운 작가의 첫 장편. 문장이 좋았다. 자기만의 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퇴근하면서 그 문장들이 아직 안에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쥐면서도.
이어폰을 빼서 가방에 넣었다.
공원이 조용했다. 사람들이 가끔 지나갔다. 산책하는 사람들. 저녁이라 아침보다 많았다. 개를 데리고 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걷는 사람들. 유진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하늘을 봤다.
빛이 바뀌고 있었다.
주황에서 붉은색으로. 붉은색이 서서히 식어갔다. 하늘 끝에서부터. 그 새벽의 반대 방향이었다.
가로등이 켜졌다.
발소리가 들렸다.
산책로에서. 익숙한 발소리는 아닌데 — 익숙한 방향이었다. 아치 문 쪽에서 들어오는 것. 유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앉아서 앞을 봤다.
그리고 왼쪽 끝에 앉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정면을 봤다.
잠깐 있다가 — 왼쪽을 봤다.
준혁이었다.
패딩은 아직 꺼내지 않은 것이었다. 회사 재킷 차림이었다. 머리가 하루를 보낸 모양이었다. 유진을 보고 잠깐 멈추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숙였다. 유진도 숙였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이름을 알게 된 그 새벽의 색이었다.
공원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가로등이 벤치 위를 덮었다. 노란 불빛이. 그 빛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별이 하나 떴다.
동쪽에서. 가장 밝은 것이 먼저. 유진은 그것을 봤다. 그 다음 둘. 새벽에 지던 별들이 — 지금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셀 수 없이 많아질 것이었다.
가을 별들.
낙엽 냄새가 났다. 바람이 와서 잎을 건드렸다. 어딘가에서 새가 한 번 울었다 — 가을 새. 여름 내내 없었던 소리가 아닌, 오래전부터 있던 소리.
두 사람은 아직 거기 있었다.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도 먼저 일어설 이유가 없었다. 출근도 없었다. 이력서도 없었다. 통장 잔고도, 5년의 기억도, 빈 이력서 칸도 — 오늘 이 벤치 위에는 없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별들이 계속 떴다.
두 사람 사이의 빈 자리는 이제 없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 그냥 더 이상 거기 없었다. 두 사람이 오른쪽과 왼쪽 끝에 앉아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