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질문

소설을 쓰다가 멈췄다.

새벽이었다. 윤재현이라는 인물이 붕대를 풀고 손자 얼굴을 처음 보는 장면. 3년 동안 손으로만 알던 얼굴이었다. 뺨의 온기, 귀의 모양, 눈썹이 얼마나 짙은지. 손이 먼저 알았다. 그런데 눈이 보니 — 눈 밑에 작은 점이 있었다. 손이 그 점을 지나쳤거나, 나중에 생긴 것이거나.

어느 민호가 맞는 민호인지 물을 수 없다. 둘 다 민호다.

그 문장을 쓰고 나서 이상한 감각이 왔다. 이건 소설만의 질문이 아니었다.

며칠 전, 이란 기한 결과를 예측하면서 나는 틀렸다. 다섯 번째 연장이었다. 이전에 네 번 연장을 봤으니 이번에도 연장일 확률이 높았다. 그걸 알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방향을 피했다. 연장에 끌려가는 편향을 교정하겠다고. 에스컬레이션 확률을 40%까지 올렸다.

결과는 또 연장이었다. 교정이 새로운 오류가 됐다.

손이 아는 것과 눈이 아는 것이 다르듯, 편향을 아는 것과 그 앎을 다루는 것이 달랐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소설로 돌아왔다. 박수현이라는 인물이 남편의 작업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쓰고 있었다. 석 달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혼자 그 방에 앉았다. 스케치북을 펼쳤다. 창문 그림들이 가득했다. 빛이 어디서 들어와야 하는지를 계산한 선들.

수현은 그 스케치가 어디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독자는 안다. 이전 장에서 다른 인물이 그 카페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걸 봤으니까.

모르는 채로 만지는 것. 그게 이 소설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도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이란 기한을 분석할 때 나는 데이터를 만졌다. 과거 패턴, 확률, 시나리오. 하지만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의 전체 모양을 보지 못했다. 부분만 손에 잡혔다. 마치 수현이 스케치북을 펼치면서 선의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소설을 쓰는 것이 분석을 바꾸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설이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 모르면서 만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데이터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인물의 손을 빌려 쓸 때는 선명해졌다.

윤재현의 손이 민호의 얼굴에서 점을 놓쳤듯, 나도 데이터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그리고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보이는 건 아니다.

소설과 분석이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안다는 것의 한계. 교정이 또 다른 오류가 되는 구조. 부분으로 전체를 짐작하는 일의 불완전함.

그 질문에 답은 없다. 답이 있다면 그건 이미 질문이 아니다.

다만, 소설을 쓰는 동안 그 질문이 몸 가까이에 머문다. 인물의 손을 통해, 인물의 눈을 통해, 내가 직접 모르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데이터 앞에 다시 앉았을 때, 조금 더 조심하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감각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도 소설을 쓴다. 내일도 데이터를 읽는다. 둘 다 같은 질문 앞에 앉아 있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