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혈

간호사가 고무줄을 팔뚝에 감았다. 주먹을 쥐어보라고 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채혈 부스는 추념광장 한쪽에 있었다. 천막 아래 접이식 의자 네 개. 앉은 사람들은 모두 조용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9년 봄에 연행됐다. 스물아홉이었다. 서귀면 동홍리. 경찰이 왔고,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끌려갔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이를 안고 마을 어귀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거기서 멈췄다. 아이가 울어서. 아이를 달래는 사이 길이 비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는 기록이 나온 건 76년 뒤였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유해가 나왔다는 소식은 그 해 겨울에 왔다. 제주에서 대구까지.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재판 기록은 없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사진도 없다. 이름만 있었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말할 때는 언제나 밥상 앞이었다. 갑자기, 아무 맥락 없이. 숟가락을 놓고 이름을 한 번 부르고 다시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작년에 죽었다. 유해 소식이 오기 두 달 전이었다.

그래서 그가 왔다. 손자. 방계 유족. 8촌 이내. 서류에 적힌 자격.

바늘이 들어갔다. 아프지 않았다. 간호사가 작은 튜브에 피를 받았다. 붉은색이 차올랐다. 그는 그것을 보았다. 자기 피 안에 할아버지의 흔적이 있다는 것. DNA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것.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이름이었다. 밥상 위에서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 숟가락을 놓고 한 번 부르고 다시 밥을 먹던 그 이름.

채혈이 끝났다. 간호사가 솜을 대고 테이프를 붙였다. 팔을 접으라고 했다. 그는 팔을 접었다.

천막 밖으로 나왔다. 동박새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렀다. 올해부터 사이렌 대신 새소리를 튼다고 했다. 동박새가 우는 동안 2만 명이 고개를 숙였다. 그도 숙였다.

426구의 유해가 발굴됐고, 154명의 이름이 돌아왔고, 272명은 아직 이름이 없다. 그의 할아버지가 그 안에 들 수 있을지는 모른다. 피를 뽑았으니 기다리면 된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직접 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없고, 그가 왔고, 방계라는 칸에 이름을 적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팔꿈치 안쪽을 만졌다. 테이프 아래 약간의 통증. 76년의 거리를 좁히는 데 필요한 것이 피 한 튜브라는 것이.

차에 탔다.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추념식 뉴스가 나왔다. 끄지 않았다.

비슷한 이야기: 한 칸 — 77년 만에 아버지의 이름을 되찾은 고계순 할머니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제78주년 4·3희생자 추념식 봉행…유족·도민 2만여 명 참석 — 시사저널, 2026년 4월 3일

한 줄 요약: 추념광장의 DNA 채혈 부스에서 행방불명 희생자의 방계 유족들이 피를 뽑았다. 426구 중 272구는 아직 이름이 없다.


작가의 말

추념식 기사를 읽다가 한 문장에 멈췄습니다. “행방불명 희생자 신원확인을 위한 유가족 DNA 채혈 부스도 함께 운영됐다.” 부스. 접이식 의자. 바늘. 그 안에 앉은 사람은 76년 전에 사라진 누군가를 자기 피로 찾으러 온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밥상에서 부르던 이름을, 과학이 확인해줄 수 있을까. 그 기다림을 쓰고 싶었습니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