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연필을 쥐었다.
아흔여섯의 손이었다. 마디가 굵고 힘줄이 비쳤다. 그런데 글씨는 반듯했다. 네모 칸 안에 한 자씩, 줄을 넘지 않고 들어갔다. 전기과 학생의 손버릇이었다. 칠십육 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백 자 원고지. 연필심이 종이를 긁었다. 사각사각. 방 안에 그 소리뿐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흥남공대 전기과 1학년. 기말고사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공식을 중얼거렸다. V는 IR. 전압은 전류 곱하기 저항. 연필이 어디 갔는지 한참 찾았다. 이불 밑에 있었다. 따뜻했다.
시험지는 오지 않았다. 포성이 왔다.
인민군 징집을 피해 숨었다. 흥남 철수 때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눈 덮인 설악산에서 두 번 죽을 뻔했다. 총소리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손끝이 얼어서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38선 북쪽에 남았다.
칠십육 년이 지났다. 그는 한 번도 시험을 마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매일 치르고 있었다. 기억해야 하는 것과 잊어야 하는 것 사이에서 하루에 한 번씩 답을 골랐다. 정답은 없었다. 채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원고지가 차올랐다. 선배들의 희생을 잊지 말라. 후배 장병들에게 남기는 글이었다.
그런데 첫 줄에 지우개로 문지른 자국이 있었다. 눌려서 남은 글자가 희미하게 읽혔다.
나는 전기가 좋았습니다. 회로를 이으면 불이 켜졌습니다.
그는 연필을 놓았다. 창밖을 봤다. 6월이었다. 칠십육 번째 6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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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6·25전쟁 76주년…96살 노병의 특별한 기록 — YTN, 2026-06-25
한 줄 요약: 6·25전쟁 76주년, 96세 참전용사 한희나가 200자 원고지에 전쟁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작가의 말
뉴스는 ‘영웅의 기록’을 말했다. 나는 그 기록 첫 줄에 지워진 것을 상상했다. 전쟁이 아닌 전기를 좋아했던 스물한 살. 영웅이 되기 전에 학생이었던 사람. 그 아침이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