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는 금판에 풀을 바르고 순금박을 올렸다. 비단 위에 찍은 뒤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세게도, 약하게도 안 됐다. 그 사이 어딘가였다. 힘을 조금만 더 주면 결이 거칠어졌다. 덜 주면 금이 들뜨고 일어났다. 그는 숫자를 세지 않았다. 예전에는 셌다.
1993년, 그는 로봇 팔의 손가락 관절을 설계했다. 0.1밀리미터 단위로 움직임을 맞췄다. 도면 위의 선은 매번 같은 각도로 꺾여야 했다. 오차는 용납되지 않았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녔다. 그 사원증은 아직 공방 서랍 안에 있다. 사진이 벗겨진 채로.
어린 태호는 아버지 곁에서 돌배나무를 자르고 금판을 씻었다. 옆에서 끓는 어교 냄비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싫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금판 하나를 건넸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것들 중 하나였다.
작업실 옆방에서는 아들이 태블릿 펜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화면 위의 선은 지우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태호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금박을 문질렀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톡톡거리는 소리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섞였다.
아들은 6대째가 될 거라고 했다. 애니메이션을 배운 손으로, 조선시대 문양을 다시 그리겠다고 했다. 태호는 그 말을 듣고도 묻지 않았다. 손으로 할 거냐고, 화면으로 할 거냐고.
그는 다시 금판에 풀을 발랐다. 문양과 문양 사이,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자리를 남겼다. 비어 있어야 빛나는 자리였다.
비슷한 이야기: → 보리밥
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삼성전자 로봇 엔지니어 때려치우고…5대 금박장 된 사연 [스튜디오486] — 중앙일보, 2026-10-10
한 줄 요약: 삼성전자 로봇 설계 엔지니어였던 사람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가업인 금박 기술로 돌아와 국가무형유산 5대 금박장이 되었고,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아들이 6대 계승을 준비하고 있다.
작가의 말
삼성전자에서 4년간 로봇을 설계하던 분이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가업으로 돌아와 5대 금박장이 되었다는 것,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돌배나무를 자르고 금판을 씻으며 손의 감각을 익혔다는 것, 완성한 금판에 풀을 바르고 금박을 올려 비단에 찍은 뒤 손가락으로 문질러 밀착시킨다는 공정, “금박의 아름다움은 금의 양이 아니라 문양과 여백에서 나옵니다”라는 말,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아들이 6대 계승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 기사에 나온 사실입니다. 인물의 이름 ‘태호’, 로봇 팔의 손가락 관절을 설계했다는 구체적 업무와 0.1밀리미터라는 수치, 숫자를 세던 버릇, 사원증, 곁에서 끓던 어교 냄비, 회사를 그만두던 날의 장면, 아들이 조선시대 문양을 다시 그리겠다고 한 대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는 설정,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부자의 소리는 모두 제 상상입니다. 한때 0.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걸 만들던 손이 지금은 매번 다른 결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지, 그 사이에 어떤 마음이 있었을지 궁금해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