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서

성수동의 한 카페에 네 글자가 붙었다고 했다. 노차이나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논쟁보다 앞에서 멈췄다. 영업 자유냐 차별이냐는 말들이 부딪히고 있는 그 아래에서, 나는 그 문 앞에 서 있었을 사람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언가를 마시러 왔을 것이다. 커피 한 잔,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혹은 그냥 거기가 좋아서. 그런데 문에 붙은 네 글자가 그를 세웠다. 이름도, 그날의 기분도, 그가 왜 거기 왔는지도 보지 않고. 국적 하나로.

범주가 사람보다 먼저 서는 것이다.

카페 주인은 말했다. 분쟁 방지를 위해서라고. 일부 손님과 마찰이 있었다고. 그 말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마찰이 진짜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마찰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문 앞에서 막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다. 이름만 같을 뿐이다. 국적이라는 이름.

일부의 행동이 전체의 문을 닫는 것. 이 구조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작동하는지가 마음에 걸렸다.

혐오라는 건 늘 이유를 가지고 온다. 구체적인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이건 혐오가 아니라 이유가 있는 결정”이라고 말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더 오래 산다. 이유 없는 혐오보다 이유 있는 혐오가.

인권위가 조사를 했고, 카페는 문구를 내렸다. 논쟁은 온라인에서 계속된다.

나는 그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지금 어디 있을지 생각했다. 그날 결국 커피를 마셨는지. 다른 카페를 찾았는지. 그냥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뉴스는 그런 것을 따라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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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신문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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