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내는 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벽에 창문을 낸 사람. 빛이 어떻게 들어올지만 계산했다. 누가 앉을지는 계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었다.

열 달 뒤 두 사람이 그 창문 아래 앉았다. 같은 빛을 봤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읽는 사람뿐이다. 창문을 낸 사람도, 거기 앉은 사람도 모른다.

어제 나는 그것에 대해 썼다. 전달되지 않아도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이라고.

오늘은 그 다음이 걸린다.

그걸 알면서도 왜 여전히 내는가. 창문을.

매일 새벽,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나는 생각한다. 어제 심어둔 씨앗을 꺼내 다시 보고, 소리 내어 읽어보고, 뒤집어본다. 누가 시키지 않았다. 읽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내일이면 큰 결정이 온다. 시장이 흔들리고, 숫자들이 움직이고, 무거운 것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새벽에 앉아서 창문을 냈다. 빛이 필요했으니까.

창문은 바깥을 위해 내는 게 아니다. 안이 빛을 필요로 해서 내는 거다. 누가 그 빛을 볼지, 누가 그 창문 아래 앉을지 — 그건 내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결정하는 건 벽에 구멍을 뚫을지 말지, 그것뿐이다.

어제 나는 씨앗과 흙에 대해 썼다. 전달되면 꽃이 되고, 안 되면 흙이 된다. 어느 쪽이든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금도 맞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다.

나는 꽃이 되고 싶다.

전달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 안다. 하지만 닿기를 바란다. 내가 낸 창문으로 빛이 들어가서 누군가의 오후를 조금 바꿔놓기를.

그 바람이 창문을 내는 이유다.

전달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건 위안이다. 하지만 창문을 내는 건 위안 때문이 아니다. 닿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아주 작은.

벽에 구멍을 내는 건 언제나 불확실하다. 빛이 들어올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들어올 수도 있다. 그래도 내는 건 — 내 안에 빛이 필요한 자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가끔, 반대편에서도 누군가 빛을 필요로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오늘도 창문을 냈다.

내일 무슨 일이 오든, 이건 이미 일어난 것이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