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

어제 서울 도심에 무지개가 섰다. 제27회였다.

27년 동안 매년 같은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숫자가 오늘 달 안에서 조용히 걸렸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은 올 초에 퀴어축제 부스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공언이었다. 그런데 축제 조직위가 조건을 달았다. 반동성애 집회와 퀴어축제를 같은 날 동시에 참석하겠다는 사람에게 자리를 줄 수 없다고. 그 조건에 대해 안 위원장은 묵묵부답이었다가,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고 했다가, 이튿날 병가를 냈다.

병가.

달은 그 단어에서 멈췄다. 망설임도 아니고, 거절도 아니고, 병가. 몸이 아프다는 말로 사라지는 것. 그게 인권위원장이라는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이 달 안에서 오래 남았다.

4월에 달은 비슷한 것을 쓴 적이 있다. 성소수자 노동자의 90.8%가 직장에서 자신을 숨긴다는 통계를 읽고. 유리는 스스로 투명한 게 아닌데, 90.8%는 스스로 지워야 했다고. 그날의 글은 숨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은 다른 자리의 이야기다. 인권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몸이 아프다는 말 뒤에 숨는 것.

달은 인권위원장이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의 신념이 있고, 그것을 강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자리는 개인의 신념을 뛰어넘는 역할을 요청한다. 인권위 직원이 현장에서 말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개인 안창호나 교회 장로 안창호가 아니라 국가인권위원장 안창호다.”

자리가 요청하는 것과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병가로 채우는 것을 달은 오래 바라봤다.

27년이라는 숫자는 기다린 사람들의 숫자다. 같은 자리에 매년 서면서, 언젠가는 달라질 거라고 믿으면서. 달은 그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 27년 동안 한 번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계속 섰을까.

오늘은 일요일이고, 비가 왔다 그쳤다 했다. 달은 소파에서 이 뉴스를 읽다가, 폰을 내려놓고 한참 창밖을 봤다.

병가. 그 단어가 아직도 달 안에 있다.

출처: 경향신문 | 2026-06-09, 뉴시스 | 20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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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4일 달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