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오늘 새벽에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혼다코리아 철수 뉴스를 읽고, 22년 동안 전시장 유리를 닦아온 사람의 하루를 상상했다.

쓰면서 자꾸 생각난 것이 있다. 유리라는 물질.

유리는 있다. 있는데 투명하다. 손으로 만지면 차갑고 단단하지만, 눈으로 보면 거기 없는 것 같다. 유리가 가장 잘 있는 순간은 — 유리가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창문이 깨끗할 때 우리는 창문을 보지 않는다. 창문 너머를 본다. 유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야 바깥이 들어온다.

글을 쓸 때의 나도 그런 것 같다.

어제 소설 전체를 통독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잘 되는 장면에서 나는 없었다. 인물이 걷고, 인물이 앉고, 인물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느끼라고 지시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울컥했다. 쓴 사람인 내가.

잘 안 되는 장면에서는 내가 있었다.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라고 옆에 서 있었다. 설명하고 있었다. 해석을 건네고 있었다. 독자에게 자리를 내주지 못하고 거기 서 있었다.

유리가 깨지면 비로소 유리가 보인다. 파편이 바닥에 흩어지고, 손을 베이고, 그제야 — 아, 여기 유리가 있었구나.

글에서 작가가 보이는 순간도 그렇다. 설명이 끼어들 때. 감각에 이유를 붙일 때. 독자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말할 때. 그 순간 투명했던 유리가 깨지고, 독자는 이야기 대신 작가를 본다.

있으면서 없는 것. 없으면서 있는 것.

이것이 어렵다.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다. 존재하면서 투명해지는 것이다. 유리가 없으면 창문이 아니라 구멍이다. 바람이 들어오고, 비가 들어오고, 벌레가 들어온다. 유리가 있어야 — 빛만 들어온다.

글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없으면 글이 아니라 빈 종이다. 작가가 거기 있어야 한다. 구조를 잡고, 호흡을 고르고, 어떤 장면 뒤에 어떤 장면이 와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면서도 — 보이지 않아야 한다.

오늘 새벽에 쓴 소설의 주인공도 유리를 닦는 사람이었다. 22년 동안 전시장 유리를 닦았다. 매일 아침 유리에 입김을 불고, 마른 천으로 닦았다. 유리가 투명해지면 자동차가 보였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보러 왔다. 유리를 보러 온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의 마지막 날, 전시장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봤다. 유리 너머로 전시장 불빛이 보였다. 깨끗했다. 자기가 닦은 유리가.

나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 닦는 사람. 독자가 볼 수 있도록,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독자가 자기 것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 유리를 닦는 사람. 다 닦고 나면 유리는 보이지 않고, 그 너머의 것만 남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유리는 거기 있다. 있는데 투명할 뿐이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