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가 끝이 아니다. 특별법을 통과시켰어도 투자 규모 협상은 계속되고, 에너지 휴전을 선언했어도 다음날 공격이 이어졌으며, 10년 만에 방중이 이뤄졌어도 직항 재개는 발표에 머문다. 말이 현실보다 먼저 도착하는 세계에서, 오늘은 그 사후 정산의 단면이다.
에너지 휴전 6일 — 무엇을 멈추자는 합의인가
왜 지금인가
10월 11일, 트럼프는 Truth Social에 올렸다. “즉각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에너지 휴전이 발효된다. 양측이 합의했다.” 6일이 지난 지금, 이 선언이 어떤 에너지 시설을 대상으로 하는지, 기간은 얼마인지, 누가 검증하는지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같은 날 “나에게는 새로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선언 후 며칠 사이 키이우와 하르키우에서 드론 공격이 이어졌고, 10월 16일 트럼프는 다시 Truth Social에 정유시설 공격 중단을 촉구했다. 합의를 발표한 쪽이 다시 “중단하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선언이 이행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신호다.
실제로 무슨 말인가
에너지 휴전은 전면 휴전이 아니다. 발전소, 열병합 발전소, 정유시설 같은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안에는 비대칭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멈춰야 하는 것은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으로, 이행 여부가 눈으로 확인된다. 반면 러시아가 멈춰야 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발전소·열병합 공격이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이 공격의 전략적 효용은 커진다. 구조상 우크라이나만 자제 압박을 받는 셈이다.
트럼프가 미국 국내를 향해서도 메시지가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러시아 정유시설 타격이 줄면 국제 유가가 내려가고 미국 소비자 기름값도 낮아진다는 논리다. “이번 선언은 우크라이나 쪽에 공격 중단을 요구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달의 의심
크렘린은 공식 수락을 하지 않았다. 크렘린 대변인 페스코프는 8월에 평화 협상을 “깊은 중단(deep pause)” 상태라고 말한 바 있으며, 10월에 모스크바가 에너지 휴전에 공식 동의했다는 확인은 없다. 젤렌스키는 60일 전면 휴전이 이행된다면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우크라이나는 계엄법상 전시 선거가 금지돼 있다. 선거 제안은 책임을 모스크바로 넘기는 외교적 수였다.
서방 일부 지도자들은 에너지 휴전에 지지 입장을 냈고, NATO 유럽 동맹국들은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700억 유로를 추가 지원하는 앙카라 공약을 유지하고 있다. SACEUR(NATO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는 “전선이 대체로 안정화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안보 지원이 이어지는 것과 에너지 휴전이 이행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어디로 가는가
시나리오 A(60%): 에너지 휴전은 이름만 남는다. 크렘린은 공식 수락 없이 침묵하고, 양측은 서로 위반을 주장하며 선언 이전의 공격 패턴이 이어진다. 우크라이나는 미국 압박에 러시아 정유시설 타격을 일부 자제하지만 러시아의 발전소·열병합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사실상 우크라이나만 자제하는 비대칭 구조로 굳어지는 형태다. 시나리오 B(25%): 미국이 구체적 시설 목록과 기간을 정하는 좁은 기술 합의로 진전시킨다. 크렘린이 공식 수락하고 2주 이상 에너지 시설 공격 빈도가 통계적으로 줄어들면 B다. 나머지(15%): 선언이 공개적으로 무너지고 트럼프가 한쪽에 책임을 돌린다.
달의 현재 판단: A(60%) — 지금까지 B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 없다. 틀릴 조건: 크렘린의 공식 수락 발표, 또는 10월 셋째 주 이후 에너지 시설 공격 건수가 통계적으로 감소하는 보도.
한미 투자 청구서 — 비준이 끝나도 협상은 계속된다
왜 지금인가
어제 이 자리에서 알래스카·반도체·호르무즈: 미국의 세 청구서를 다뤘다. 오늘은 그 청구서 중 한국 것을 들여다본다.
2025년 7월 30일 한미 무역합의가 발표됐다. 조건은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 수출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15%로 낮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 국회가 이 합의의 이행 근거인 대미투자특별법을 즉시 통과시키지 않자, 트럼프는 올해 1월 26일 관세를 25%로 올리겠다고 압박했다. 특별법은 6주 뒤인 3월 12일 226표 찬성으로 통과됐다. 비준 문제는 해소됐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무슨 말인가
특별법이 통과된 뒤에도 투자 규모 협상은 계속되고 있다. 1호 사업인 텍사스 엔시날 복합발전소의 사업비를 놓고 미국이 한때 250억 달러를 요구했고, 현재는 220억 달러 선에서 절충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합의액 자체를 초과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MOU(양해각서—구속력 없는 합의문)는 통과됐지만, 사업마다 청구서가 다시 나오는 구조다.
합의의 법적 토대가 달라졌다는 점도 중요하다. 관세 인하의 근거였던 IEEPA(국제비상경제권법)가 2월 연방법원 판결로 행정명령 근거로 활용하기 어려워졌다. 미국은 지금 232조(안보), 301조(무역 불공정) 등 다른 법 조항을 통해 관세를 유지하고 있다. 관세가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토대가 바뀌어서 미국은 언제든 다른 조항으로 다시 관세를 올릴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달의 의심
1월의 25% 위협은 결국 집행되지 않았다. 다음날 트럼프는 수위를 낮췄고, IEEPA 판결로 법적 근거도 좁아졌다. 압박 카드로서는 효과가 있었고, 실제 집행 의지가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문제는 25% 위협이 사라진 자리를 사업비 증액과 비관세 장벽 협상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이 달라졌을 뿐, 협상이 끝나지 않았다. 미국이 협상 도구로 쓸 수 있는 조항이 IEEPA에서 232조·301조로 이동했다는 것은, 지렛대의 법적 성격이 달라졌을 뿐 지렛대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라는 뜻이다.
어디로 가는가
시나리오 A(65%): 협상은 사업별 조정의 형태로 계속된다. MOU 수준 사업들이 하나씩 조건 협의를 거치고, 전체 투자 최종 결정은 수년 뒤다. 11월 3일 중간선거 전까지 양국 모두 공개 갈등을 피한다. 시나리오 B(25%): 트럼프가 비관세 장벽이나 투자 지연을 이유로 공식 문서(행정명령 또는 통상법 조항 활용)로 관세와 연계한 압박을 재개한다. 나머지(10%): 사업비 협상이 일괄 타결돼 투자 규모가 합의액 초과로 확정된다.
달의 현재 판단: A(65%) — 양측 모두 갈등을 공개할 유인이 없다. 틀릴 조건: 트럼프가 관세 조정을 미국 연방관보(Federal Register)에 공식 게재하거나, 232조·301조 기반의 새 행정명령에 한국을 명시하는 경우.
야당을 통해 온 중국의 화해 — 대만 정부는 소외됐다
왜 지금인가
올해 4월, 베이징은 6년 이상 단절됐던 대만과의 일부 관계를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직항 항공편 재개, 대만 양식 수산물 수입 허용, 국공(國共—국민당과 공산당) 소통 채널 구축이 내용이었다. 4월 10일 시진핑이 국민당 주석 정리원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10년 만의 회동이었다. 한 달 뒤 5월에는 9년 만의 미중 정상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고, 9월에는 워싱턴에서 다시 만나 약 300억 달러 규모의 비민감 품목 관세 인하를 합의했다.
11월 중국 선전 APEC, 12월 마이애미 G20을 앞두고, 베이징은 지금 유화 국면을 만들어가고 있다.
실제로 무슨 말인가
4월 발표의 구조를 보면 베이징의 의도가 읽힌다. 직항 재개, 수산물 수입, 국공 소통 채널. 이 세 가지는 모두 대만 정부인 라이 칭더 행정부를 거치지 않는다. 직항 노선을 운영하려면 타이베이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즉 이행 자체가 라이 정부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고, 협력하면 정치적 비용을 치르는 것은 라이 정부가 된다. 약속은 베이징이 하고, 이행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은 타이베이가 갖는 구조다.
지금까지 직항 재개나 수산물 수입의 실제 이행을 확인하는 보도는 없다. 4월 발표는 발표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달의 의심
140억 달러 규모의 미국 대만 무기 패키지가 여전히 미결이다. 트럼프는 이 패키지를 승인하지도 보류 공식 발표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고 있다. 시진핑은 미중 회담에서 대만 독립 반대를 요구했고 트럼프는 정책을 바꾸지 않았지만, 패키지를 결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베이징에는 이득이다. 대만은 국방예산을 역대 최대로 늘리면서(2027년 예산안 기준 약 1.1조 대만달러, 환산 약 340억 달러) 압박에 대응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이 직항이나 수산물 수입 같은 경제적 혜택을 원한다는 것도 라이 정부가 알고 있다. 베이징은 그 간극을 노리고 있다.
어디로 가는가
시나리오 A(60%): 제스처는 발표 수준에 머문다. 타이베이는 정당(국민당) 경유 채널을 공식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직항과 수산물 이행은 APEC 이후로 미뤄진다. 베이징은 11월 APEC까지 대규모 군사 도발을 자제한다. 시나리오 B(25%): 미국이 140억 달러 패키지를 공식 보류하거나 규모를 축소한다는 신호가 나온다. 그러면 베이징은 보상으로 이행 조치를 일부 시작하고, 라이 정부는 고립 압박을 받는다. 나머지(15%): APEC 이후 유화가 끝나고 군사·회색지대 압박이 재개된다.
달의 현재 판단: A(60%) — 선전 APEC까지는 유화 기조를 유지할 유인이 있다. 틀릴 조건: 직항 노선 첫 운항이 보도되거나, 미국이 140억 달러 무기 패키지 승인·보류를 공식 결정하는 경우.
세 꼭지가 공유하는 패턴이 있다. 미국이 말(휴전, 관세 인하, 관계 재개)로 지렛대를 쥐고, 상대(모스크바, 베이징)는 이행 비용 없이 선언의 혜택을 유지하며, 동맹국(키이우, 서울, 타이베이)이 사후 청구서를 받는다. 합의는 끝이 아니다. 사후 정산의 규칙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