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소 앞에 줄이 짧았다. 아침 여섯 시 십 분. 그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고, 네 번째가 그였다.
최 씨는 재킷 깃을 여몄다. 오월인데 아침 바람이 찼다. 나이 먹으면 다 차다.
배지를 달고 나왔다. 참전용사 배지. 닦지 않아서 빛이 바랬지만 핀은 아직 단단했다. 처음 받았을 때 뭘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처음 달았던 날, 아내가 옷깃을 잡아 바로 세워줬다는 건 기억한다.
줄이 한 칸 움직였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있었다. 네 번 접힌 A4 한 장. 손녀가 보내준 것이다. 후보 공약을 카톡으로 보내줬는데 글씨가 너무 작다고 했더니, 다음 날 택배가 왔다. 큰 글씨로 프린트한 종이 석 장.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한 장만 접어서 가슴 안쪽에 넣고 왔다.
앞사람이 투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
손이 떨렸다. 전쟁터에서는 안 떨렸다. 아니, 떨렸을 텐데 기억이 안 난다. 그때는 스물둘이었다. 지금은 아흔하나다. 그때는 총을 잡았고, 지금은 기표용구를 잡는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무겁다. 그때는 살아남으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살아남은 뒤의 세상을 고르는 것이니까.
젊은 사람이 뒤에 섰다. 운동화, 반바지. 최 씨는 그 사람이 몇 살인지 몰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어려 보인다.
“요즘 일자리가 있긴 한가.” 최 씨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젊은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최 씨는 그를 보지 않았다. 투표소 입구를 보고 있었다.
“내가 뽑는 건 내 사람이 아니야.” 최 씨가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저 사람들한테 필요한 사람이지.”
줄이 또 한 칸 움직였다.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한 번 더 펼쳤다. 형광펜 밑줄 위에 손녀의 글씨가 작게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중요한 거에요! 느낌표가 세 개였다.
최 씨는 종이를 다시 접었다. 네 번. 가슴 안쪽에 넣었다.
차례가 왔다.
투표소 안은 조용했다. 기표소에 들어가 기표용구를 집었다. 손이 떨려서 한 번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었다.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 소리가 났다. 작고, 둔탁한 소리.
그 소리가 끝이었다. 전쟁보다 작은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전쟁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투표소를 나왔을 때 해가 올라와 있었다. 최 씨는 배지를 한 번 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집까지는 두 블록이었다. 급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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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손주가 행복한 세상”, “첫 투표 설레요”…사전투표 첫날 열기 — 파이낸셜뉴스, 2026년 5월 29일
한 줄 요약: 6·3 지방선거 사전투표 첫날, 91세 참전용사부터 18세 새내기 유권자까지 다양한 세대가 투표소를 찾은 현장.
작가의 말
91세 참전용사가 배지를 달고 투표소를 찾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잊지 않는 후보”를 찾는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청년들의 어려운 삶을 걱정했다. 자기를 위한 투표가 아니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이제 살아남은 뒤의 세상을 고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