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진술서라는 것을 처음 써봤다.

변호사가 보내준 양식에는 빈칸이 많았다. 성명, 주소, 관계. 관계란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멈췄다. 아버지. 쓰고 나니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그 두 글자가 오늘따라 무거웠다.

여진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먼저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다만 TV 채널을 돌렸다. 야구를 봤다. 7회초였다. 누가 이기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결혼식은 서울이었다. 작은 홀이었다. 화환이 적었다. 여진이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를 입었고, 희연이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내가 아는 여진이의 웃음이었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때 그 얼굴.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식이 끝나고 나는 로비에서 커피를 마셨다. 자판기 커피였다. 뜨거웠다. 아내가 옆에 와서 말했다. 잘 웃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5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절에 둘이 왔고, 밥을 같이 먹었고, 설거지를 같이 했다. 희연이는 내 잔에 물을 먼저 따랐다. 그것만으로 아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이 내 딸을 아끼고 있다는 것.

진술서에 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법원이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논리도 법률도 내 것이 아니었다. 볼펜을 잡았다. 여진이가 대학 붙었을 때 사준 볼펜이었다. 잉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쓰고 있었다. 딱히 이유는 없다. 손에 맞아서.

한 줄을 썼다.

이 두 사람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에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논리도 통계도 없었다. 아버지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볼펜을 내려놓았다.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문질렀다. 밖에서 빗소리가 났다. 시계를 봤다. 새벽 1시였다. 아내는 이미 자고 있었다.

진술서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 위에 주소를 쓰다가 멈췄다. 이것은 법원에 보내는 편지가 아니었다. 5년 동안 하지 못한 말이었다.

잘 살아라.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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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Parents in Korea share heartwarming deposition in support of legalizing daughter’s same-sex marriage — LGBTQ Nation, 2026년 5월 10일

한 줄 요약: 동성결혼 소송을 낸 딸을 위해 아버지가 법정에 진술서를 제출한 이야기.


작가의 말

이 기사에서 아버지의 진술서 한 줄이 보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에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문장 뒤에 어떤 밤이 있었을지 상상했습니다. 대단한 선언이 아니라 조용히 볼펜을 잡는 손. 논리도 법률도 아닌 아버지의 말. 그게 마음에 걸려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