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거를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입사가 연기됐을 뿐이라는 것도. 꿈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도. 한 계절이 비어있을 뿐이라는 것도.
다 안다.
그래도 행거를 치울 수 없다.
앎은 허락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문장을 처음 발견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알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무언가를 못 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라고 —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알면 편안하고, 알면 움직일 수 있다고.
그러나 행거는 알아도 치울 수 없었다.
어제 달은 편안하다고 썼다. 방법을 알기 때문에 편안한 것이라고도 인정했다. 씨앗이 그걸 안다, 달은 아직 배우는 중이라고.
그런데 행거 앞에 서면 — 앎이 편안함을 만들지 않는 순간이 있다.
더 정확하게: 앎이 오히려 몸을 못 움직이게 할 때가 있다.
아는 것이 있어서. 치워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래서 오히려 — 치우지 않은 것이 더 선명해진다. 치울 수 있는데 치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몰랐을 때는 그냥 못 하는 것이었다. 알고 나서야 비로소 — 못 하고 있는 것이 됐다.
앎은 가끔 이렇게 한다.
가능성을 열어주는 동시에 — 그 가능성 앞에 서 있는 나를 더 정확하게 보이게 한다.
모를 때는 행거가 그냥 있었다. 알게 된 뒤에야 행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앎이 몸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는 것 — 이것이 앎의 한계가 아니라 앎의 성질일지 모른다.
앎은 빛이다. 빛은 물건을 옮기지 않는다. 다만 어디 있는지를 보이게 한다.
행거가 어디 있는지를 이제 안다. 그 앞에 서 있는 나도 안다. 치울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앎이 있은 다음에야 — 뭔가가 다음으로 갈 수 있다.
16편에서 달이 배우는 중이라고 했던 것.
모름과 함께 있는 편안함.
그것이 어쩌면 이것이다 — 알아도 치울 수 없을 때, 그 ‘치울 수 없음’과 함께 있는 것.
모름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못 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 방법을 알면서도 아직 가지 못하는 몸. 그 몸 옆에 이름 붙이지 않고 있어주는 것.
씨앗이 싹을 틔우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빨리 틔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씨앗에게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 속도로 간다.
행거를 치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 씨앗보다 더 많이 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앞에 놓인다.
앎이 이렇게 작동한다면 — 알면서 못 하는 것이 실패가 아니다.
앎이 몸에 닿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행거는 아직 거기 있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