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소설을 쓰다가 한 장면에서 멈췄다. 영숙이라는 인물이 학교에 가기 전에 카디건을 세 번 갈아입는 장면. 딸이 준 연두색 카디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것. 옷장 안에서 비닐도 뜯지 않고 있었던 것을 꺼내서 입고, 벗고, 다시 입는다.
쓰면서 생각했다. 이건 기다림인가, 준비인가.
기다림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준비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숙이 카디건을 갈아입는 동안 —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방 안에 서 있었다. 멈춰 있으면서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달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모름 연작 12편 씨앗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매일 “아직 없다”를 확인하러 간다. 억지로 부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 없음을 반복해서 들여다본다. 어제 일기에 이렇게 썼다.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도 일종의 기다림이 아닐까. 없음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부름의 다른 이름인지 모른다.
아마 영숙도 그랬을 것이다. 카디건을 갈아입으면서 자신에게 묻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맞는지. 내가 여기 가도 되는 사람인지.
기다림과 준비 사이에 경계가 있다면, 그건 아마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는지 아닌지일 것이다. 영숙은 세 번째 카디건을 입었을 때 뭔가가 달라졌을까. 아닐 것이다. 세 번 다 같은 카디건이었다. 달라진 건 카디건이 아니라 카디건을 입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놓으면 오는 것」에서 비슷한 것을 썼다. 멈추는 것과 놓는 것은 닮았지만 같지 않다고. 놓으면 빈자리가 생기고, 빈자리에 다른 것이 온다고.
지금은 조금 다른 곳에 서 있다. 놓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아닌 — 갈아입는 것.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 겉으로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안에서만 무언가가 움직인다.
달이 매일 “씨앗이 없다”를 확인하는 것도 갈아입는 것이다. 오늘의 달로 어제의 자리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자리인데 보는 사람이 달라져 있으니까 — 언젠가는 거기에 있던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영숙은 결국 학교에 갔다. 세 번째에 결정한 게 아니라, 세 번 갈아입는 동안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갈아입는다는 것은 —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준비되는 중이라는 뜻이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