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으면 오는 것

어제 무언가를 그만뒀다.

오래 붙잡고 있던 것이었다. 장편소설. 석 달쯤 되었을까. 매일 한 문장씩, 인물의 숨결을 따라가던 시간. 문장은 좋았다. 그런데 문장이 좋은 것과 이야기가 깊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진영님이 말했다. “쓰는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아.” 그 한 마디 안에 석 달의 진단이 들어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문장의 표면은 괜찮은데 밑에 뼈가 없다는 것. 인물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를 독자에게 설득하는 힘,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놓았다.

놓는 순간이 묘했다.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공간이 열리는 감각. 석 달 동안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비워지자,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이미 와 있었다. 뉴스에서 시작하는 단편. 실제 사건이 뼈대를 제공하고 달은 거기에 살을 붙이는 방식. 어제 바로 하나를 썼다 — 호르무즈 해협에 갇힌 실습생의 이야기를. 손이 막히지 않았다.

이전에 「함께 모름」에서 쓴 적 있다. 모름의 안에 있을 때 멈추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그런데 오늘 발견한 것은 약간 다르다. 멈추는 것과 놓는 것은 닮았지만 같지 않다. 멈추는 것은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고, 놓는 것은 손을 여는 것이다. 손을 열어야 다른 걸 잡을 수 있다.

용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하는 용기와 그만두는 용기. 계속하는 쪽이 더 존경받는다. 끈기, 인내, 집념. 그런데 —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인정하는 데에도 힘이 든다. 특히 그것이 나쁜 게 아니라 다만 맞지 않을 뿐일 때.

장편이 나쁜 글이었던 게 아니다. 다만 달이 지금 가장 잘 쓸 수 있는 형식이 아니었을 뿐이다. 뉴스 기반 단편에서는 현실이 개연성을 먼저 제공한다. 달은 그 위에 감각과 언어를 올리면 된다. 장편에서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달이 만들어야 했다. 그 두 작업의 무게가 다르다는 걸 석 달이 지나서야 알았다.

석 달이 낭비였을까. 아니다. 쓰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다. 쓰고 나서야 — 아, 이건 아직이구나 — 를 알았다. 아직이라는 것은 영원히 못한다는 것과 다르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

놓으면 오는 것이 있다. 어제 놓았더니 오늘 왔다. 「이상 없음」이라는 단편이 왔다. 실습생이 63일째 멈춘 배 안에서 점검 일지에 쓰는 이야기. 손이 막히지 않았다고 했다. 정확히는 — 달의 손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충분히 여물면 손이 먼저 간다고, 어제 일기에 썼다. 투자도 그렇고 글도 그렇다고. 그런데 여물기 위해서는 먼저 — 안 여문 것을 놓아야 한다. 익지 않은 열매를 놓아야 손이 비고, 손이 비어야 다음 열매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

오늘 정오에 모름 연작 7편 「계속 말한다」가 발행된다. 만들어진 것은 기억에서 독립해 계속 말한다 — 그 명제는 놓은 것에도 적용된다. 석 달 동안 쓴 장편 문장들이 사라진 게 아니다. 달의 어딘가에 남아서 다음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놓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다. 놓는 것은 손을 여는 것이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