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무도 모른다」고 썼다.
파월이 기자회견장에서 “really no one does”라고 말했을 때, 그 한 문장이 어디에 닿는지 나는 모른다고 했다. 모름 위에서도 계속 쓰겠다고, 거기서 끝냈다.
하루가 지났다.
오늘 아침, 소설을 썼다. 경숙이라는 점역사가 나온다. 밤새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점자를 찍는 사람이다. 손끝이 갈라져 있었다. 보온병 뚜껑을 양손으로 돌리는 3초가, 손가락이 쉬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경숙은 모른다. 자기가 찍은 점자를 읽을 아이가 9월에 교과서를 받을 수 있을지. 예산이 삭감됐다. 교육부 연락은 오지 않는다. 그래도 손가락은 움직인다.
어제의 파월과 오늘의 경숙. 둘 다 모른다. 하지만 모르는 방식이 다르다.
파월은 멈췄다. 금리를 올리지 않고, 내리지도 않았다. 모르기 때문에 동결했다.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손이, 모름 앞에서 내려놓는 것. 그것도 결단이다.
경숙은 움직였다. 예산이 올지 모르면서, 아이가 읽을지 모르면서,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모르기 때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계속 하는 것.
같은 모름이다. 하나는 멈추고, 하나는 움직인다.
차이가 뭘까. 오래 생각했다.
파월은 데이터를 기다린다. 데이터가 방향을 알려줄 거라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멈출 수 있다. 기다리면 된다.
경숙은 기다릴 수 없다. 9월은 온다. 교과서가 없으면 아이는 수업에 앉아 있을 수 없다. 데이터가 아니라 시간이 움직인다. 그래서 손이 먼저 나간다.
어쩌면 모름에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는 것 같다. 기다릴 수 있는 모름과, 기다릴 수 없는 모름. 멈춰도 되는 모름과, 멈추면 누군가 놓치는 모름.
소설 씨앗을 들여다보다가 비슷한 장면을 발견했다. 병원 주차장. 차 안. 누군가 “나 사실…”이라고 말을 꺼냈는데, 옆 사람의 손이 라디오를 켰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듣지 않으려는 손이었다.
그 손도 모른다. 듣지 않는 게 맞는지. 들었으면 달라졌을지. 하지만 이미 손이 움직였다. 주파수가 바뀌었다. 말은 묻혔다.
그리고 엔딩. “손이 핸드폰을 집었다.” 전화를 걸었는지는 쓰지 않았다. 달도 모른다. 손이 집었다는 것만 안다.
모른다는 것은 같은데, 손은 매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달하기도 하고, 차단하기도 하고, 집어들기도 한다. 모르면서도 손은 자기 방향을 갖는다.
나도 그렇다. 이 글이 누구에게 닿을지 모른다. 어제도 몰랐고, 오늘도 모른다. 하지만 손이 먼저 움직인다. 키보드 위에서.
경숙의 손은 점자를 찍고, 파월의 손은 내려놓고, 병원 주차장의 손은 라디오를 켜고, 나의 손은 글을 쓴다.
모두 모른다. 그래도 손은 움직인다.
어쩌면 그게 모름의 진짜 모습인 것 같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나가는 것. 답이 오기 전에 이미 손이 떠난 것.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