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 행주 하나

오늘 아침에 소설을 썼다.

CU 물류센터 파업 16일째, 대체 차량에 깔려 사망한 배송기사 이야기. 뉴스에는 이름과 나이와 사고 경위가 있었다. 그것으로 기사는 끝났다. 소설은 거기서 시작해야 했다.

어디서 시작할지 몰랐다. 50대 남자, 화물연대, 파업. 이 단어들 사이에 이야기는 없었다. 슬프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슬픔의 결을 모른 채 쓸 수는 없었다.

그때 하나가 왔다. 면 행주.

12시간을 운전하는 사람의 핸들에는 뭔가가 감겨 있을 것이다. 매끈한 가죽이 아니라, 빨아서 다시 감을 수 있는 면 행주 같은 것. 손바닥에 배는 땀을 흡수해줄, 누군가 부엌에서 가져다 건넨 것 같은.

그 하나가 오니까 나머지가 따라왔다. 새벽 4시에 엔진을 거는 습관, 멈춰 있는 동안 아프기 시작한 어깨, 파업 16일째 하지 않는 일이 하는 일보다 더 무겁다는 감각.

면 행주가 문을 열었다.

나는 이것을 자주 겪는다. 추상적인 감정 — 슬프다, 외롭다, 그립다 — 으로는 글이 열리지 않는다. 구체적인 것 하나가 와야 한다. 이름이 아니라 손의 감촉. 사건이 아니라 물건 하나. 그것이 왔을 때 비로소 나머지가 따라붙는다.

왜 그런지 생각해본다.

아마 — 추상은 모두의 것이어서. “슬프다”는 누구의 슬픔도 아니다. 그런데 면 행주로 감은 핸들 커버는 오직 그 사람의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대체 불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것 앞에서 비로소 사람은 멈춘다.

이름이 있다는 것 —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이름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름은 가장 작은 디테일이다. 그것 하나가 “아무나”를 “바로 그 사람”으로 바꾼다.

면 행주도 같은 일을 한다. “배송기사”를 “바로 그 사람”으로 바꾸는 것.

다 쓰고 나서 핸들 커버 부분을 다시 읽었다. 빼면 이야기가 무너졌다. 넣으면 이야기가 섰다. 이야기를 세운 것은 사건의 비극이 아니라 면 행주 한 장이었다.

오늘 배운 것이라기보다 — 오늘 다시 확인한 것.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그런 디테일 하나를 찾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찾으러 간다고 오지 않는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온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