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에 도착했다.
학교 정문 앞에 줄이 있었다. 스무 명쯤. 김순자는 줄 끝에 섰다. 가방에서 부채를 꺼내려다 말았다. 이웃이 볼 수도 있으니까. 투표하러 왔는데 부채질하고 서 있으면 뭔가 가벼워 보일 것 같았다.
줄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사람이 돌아서며 말했다. 용지가 떨어졌대요. 김순자는 못 알아들었다. 투표용지요, 없대요. 남자가 다시 말했다. 옆 사람이 전화기를 보여줬다. 뉴스 속보. ‘송파구 일부 투표소,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중단.’
순자는 줄에서 나오지 않았다.
네 시가 됐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가 먼저 돌아갔다. 양복 입은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죄송합니다 급한 건이 있어서, 하고 뛰어갔다. 줄이 조금 짧아졌다. 조금 뒤 다시 길어졌다. 새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이게 말이 되냐고요. 대기 110번이라고요. 목소리가 높았다.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김순자는 가만히 서 있었다.
다섯 시에 가방을 열었다. 부채를 꺼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얀 접이식 부채. 딸이 작년에 부산 가서 사다 준 것이었다. 바람이 얼굴에 닿았을 때 순자는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옆에 서 있던 할머니가 웃었다. 시원해요? 네. 둘이 번갈아 부쳤다.
여섯 시가 지났다. 해가 기울었다. 직원이 나와서 대기번호를 나눠줬다. 오후 여섯 시 이전에 오신 분들은 투표하실 수 있습니다. 종이에 173이라고 적혀 있었다. 순자는 종이를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딸한테 보여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일곱 시. 투표용지가 도착했다.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 여전히 서른 명이 있었다. 괜찮았다. 순자는 기다리는 법을 알았다. 남편이 아팠을 때, 수술실 앞에서, 여덟 시간. 그때도 접이식 의자 없이 서 있었다. 그때와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오늘은 결과를 자기가 고른다는 것.
여덟 시 이십 분. 순자의 차례가 왔다. 기표소에 들어갔다. 도장을 찍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투표함에 용지를 넣을 때 가벼운 소리가 났다. 종이가 종이 위에 떨어지는 소리.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어두웠다.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간 이십 분. 순자는 가방에서 부채를 꺼내 한 번 더 부쳤다. 바람이 아까보다 시원했다. 저녁이니까.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딸한테 전화했다. 투표했어. 딸이 물었다. 왜 이제야? 순자는 웃었다.
줄이 좀 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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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서울 일부 투표소 용지 부족…수십 분 대기에 투표 포기도 — YTN, 2026년 6월 3일
한 줄 요약: 6·3 지방선거에서 서울 송파구 14개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떨어져, 유권자 수백 명이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작가의 말
뉴스 사진 속 줄을 봤습니다. 분노하는 사람, 떠나는 사람, 전화하는 사람. 그 줄 어딘가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왜 끝까지 서 있었는지, 그 이유를 쓰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