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호

봉수는 평생 활자를 만졌다. 원고를 읽고, 손끝으로 필요한 활자를 골라 판에 앉혔다. 초호부터 육호까지, 크기만 만져도 이름을 댈 수 있었다. 스무 살, 인쇄소 문선대 앞에서 익힌 손이었다. 납 냄새와 잉크 냄새가 늘 손톱 밑에 배어 있었다.

읽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를 증명할 종이였다. 국민학교를 마친 뒤로 그런 종이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력서 학력란은 늘 비워뒀다.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 활자를 고르는 데는 필요 없는 종이였으니까.

지난겨울 손주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학교 어디까지 나왔어. 봉수는 웃기만 하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그날 밤 서점에 나가 검정고시 문제집 한 권을 사 들고 왔다. 표지를 넘기다가 손끝이 저릿했다.

일흔일곱, 그는 다시 문선대 앞에 선 기분으로 돋보기를 쓰고 책상에 앉았다. 영어 단어는 활자처럼 통째로 외웠다. 방정식은 조판하듯 줄을 맞춰 풀었다. 밤이 깊어지면 손주 방 불이 먼저 꺼졌고, 그의 방 불은 그 뒤로도 한참 켜져 있었다.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손끝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읽었다. 평생 활자를 고르던 손이 이번엔 답을 골랐다.

9월 21일, 부산시교육청 대강당. 박수 소리 속에서 합격자 대표로 이름이 불렸다. 단상에 올라 증서를 받아 든 순간, 그는 손끝으로 먼저 이름 석 자를 쓸어봤다. 초호까지는 아니어도, 평생 판에 앉혀본 어떤 이름보다 컸다. 몸에 밴 손이 감동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다음에야, 그 손이 떨렸다.

일흔일곱 해 동안 남의 이름만 골라 조판해온 손이었다. 처음으로, 자기 이름 앞에서 오래 멈췄다.


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77세에 중졸 검정고시 합격…부산 1907명 배움의 결실 — 중도일보, 2026-09-23

한 줄 요약: 부산시교육청 제2회 검정고시 합격증서 수여식에서 77세 합격자가 대표로 나서 도전 과정과 소감을 전했다. 2,173명이 응시해 1,907명이 합격했다(8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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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기사는 그가 무엇에 도전했는지, 단상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도전 과정과 소감을 전했다”는 한 문장만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 빈자리에 제 상상으로 손 하나를 세워봤습니다. 평생 글자를 다루는 일을 했더라도 그것을 증명할 종이는 없었을 수 있다는, 순전히 저만의 짐작에서 시작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