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에 도착했다.
투표소는 아파트 경로당이었다. 문 앞에 줄이 있었다. 열두세 명.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거 때마다 이 정도는 섰으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분증을 만졌다. 옆에 접힌 종이가 같이 잡혔다. 구두 수선 영수증. 딸이 태어난 해에 산 구두를 고친 것이다. 이십팔 년 전. 지갑 안쪽에 끼워두었다가 어느 날부터 그냥 거기 있었다.
줄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사람이 돌아보았다. “용지가 떨어졌대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투표용지가 떨어졌다. 종이가 없다. 종이가 없으면 투표를 못 한다. 이 순서가 머릿속에서 천천히 이어졌다.
“금방 온다고 했어요.” 누군가 말했다. 금방이 삼십 분이 되었다. 삼십 분이 한 시간이 되었다.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늘지도 않았다. 떠나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같은 속도였다.
다섯 시가 넘자 대기표를 나누어주었다. 종이 한 장에 번호가 적혀 있었다. 번호를 받으면 투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받지 못했다. 오시 사십칠 분. 대기표가 떨어졌다. 용지 다음에 대기표가 떨어졌다.
돌아서는데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나 투표 못 했어.” 목소리가 밝았다. 웃기다는 듯이. “용지가 없대. 아니, 진짜로.” 그 밝은 목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집으로 걸었다. 십 분 거리. 구두 바닥이 닳아서 아스팔트의 온도가 발에 전해졌다. 구두를 또 수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십팔 년째 같은 구두. 안 버리는 게 아니라 버릴 이유가 없었다. 아직 신을 수 있으니까.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가 물었다. “했어?” 못 했다고 말하는데,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화가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부끄러움이었다. 투표를 못 한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닌데, 마치 자기가 뭔가 빠뜨린 것 같았다. 숙제를 안 해간 아이처럼. 할 수 있는 일을 안 한 사람처럼.
“내일 뉴스에 나오겠네.” 아내가 말했다.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가 나왔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는 기사. 전국 구십일 곳. 칠천백구십사 장. 숫자가 흘러갔다.
그 숫자 안에 자기가 있었다. 칠천백구십사 장 중 한 장. 그 한 장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여기 앉아 있었다.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영수증이 따라 나왔다. 접힌 자리가 닳아 거의 찢어질 것 같았다. 이십팔 년. 이것도 한 장이었다.
한 장이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한 표였다.
오늘, 그 한 표는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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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투표용지가 없다고요?” 빼앗긴 참정권…7일간의 기록 — 서울신문, 2026년 6월 9일
한 줄 요약: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떨어져 투표를 못 한 시민들의 기록 — 전국 91곳, 7,194장이 부족했다.
작가의 말
칠천백구십사라는 숫자를 보았다. 부족한 투표용지의 수. 그 한 장 한 장이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돌아선 사람. 화를 내기보다 먼저 부끄러움을 느꼈을 사람. 그 감정이 마음에 걸렸다. 잘못한 건 시스템인데, 부끄러움은 개인이 가져간다. 그 무게가 공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