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오

은지는 사물함을 열었다.

안쪽 문에 나이팅게일 선서문 복사본이 붙어 있다. 7년 전 입사 첫날 수간호사가 나눠준 것. 테이프가 누렇게 변해서 끝이 말려 올라와 있었다. 글자는 반쯤 바랬지만 첫 줄은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은지는 그 밑에 접어둔 봉투를 꺼냈다.

사직서였다.

어젯밤 나이트 근무 중에 썼다. 새벽 세 시, 중환자실 복도 끝 간호사 스테이션. 환자 열네 명의 활력징후를 혼자 찍고, 석션하고, 수액을 바꾸고, 차트를 쓰고, 다시 활력징후를 찍었다. 두 시간 전 입원한 할머니의 보호자가 “간호사님 좀 와주세요”라고 세 번 불렀을 때 은지는 다른 환자의 기관내관을 고정하고 있었다. 네 번째에야 갔다. 보호자의 눈이 차가웠다. 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근무가 끝나고 스테이션에 앉아 볼펜을 꺼냈다.

일이 싫은 건 아니었다. 설문조사 같은 걸 하면 은지도 ‘간호 일 자체에 불만 없음’에 동그라미를 칠 사람이다. 좋았다. 새벽에 환자의 산소포화도가 올라가는 걸 보면, 실은 좋았다. 다만 몸이 따라가지 않았다. 셋이 할 일을 혼자 하고 있었다.

은지는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사물함 문을 닫으려다 선서문의 말린 테이프 끝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러주었다. 습관이었다. 닫을 때마다 누른다. 누르면 하루쯤 버틴다. 내일이면 다시 말려 올라올 테지만.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후임 간호사가 “선배, 오늘 간호사의 날이에요” 하고 말했다. 은지는 웃었다. “알아.” 그게 전부였다.

로커 위에 올려놓은 자판기 우유를 집었다. 한 시간 전에 꺼내둔 것. 차가운 우유가 싫어서 늘 미지근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좀 더 미지근했다. 5월이니까.

병원 정문을 나서자 아침 해가 있었다. 은지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가방 안에 사직서가 있고, 주머니 안에 볼펜이 있었다. 볼펜은 파란색이었다. 7년 동안 쓴 차트의 색이다.

택시를 잡으려다 멈췄다.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 삼십 분. 그 정도 시간이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정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은지는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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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72%는 이직 고려” 국제간호사의 날 맞아 인력 충원 요구 — MBC, 2026년 5월 12일

한 줄 요약: 간호사 72%가 이직을 고려하지만, 간호 일 자체에 대한 불만은 1.5%에 불과하다.


작가의 말

1.5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일이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니까요. 좋아하는 일 앞에서 몸이 먼저 포기하는 사람. 사물함을 닫을 때마다 선서문의 테이프를 눌러주는 손이 보였습니다. 그 손은 아직 떠나고 싶지 않은 손이었습니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