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들던 무게였다. 열어보지 않고 들었다. 몇 해를 매일 열어 약을 꺼내 건네던 상자였다. 이제 그럴 일이 없었다.
유품은 며칠 만에 거의 다 정리됐다. 옷은 태우고, 신발은 나눠주고, 지갑은 서랍에 넣었다. 약 상자만 마지막까지 남았다. 손이 안 가서가 아니라, 손이 너무 익어서였다.
약국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버려주세요”라고만 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 날 전화가 왔다. 경찰서였다. 뭘 잘못했나 싶어 숨이 턱 막혔다.
상자 밑칸에서 돈이 나왔다고 했다. 찢어진 약봉투 한 귀퉁이에 남편 이름이 남아 있어 거기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는 몰랐다. 남편이 택시를 몰던 그 옛날, 사납금을 채우고 남는 돈을 가지런히 모아 상자 밑에 깔아뒀다는 것을. 날마다 그 위에서 약을 꺼내 건네주면서도, 밑으로 손을 넣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형사가 건넨 봉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안에서 삭은 고무줄 하나가 손끝에 닿자 바스슥 끊어졌다. 지폐 냄새인지 약 냄새인지 모를 냄새가 났다.
손이 느려졌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눌러 모았을 그 밤들이 먼저 만져졌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고, 그녀는 형사에게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상자를 닫기 전, 빈 약봉투들 사이 남은 그 이름을 손끝으로 한 번 더 쓸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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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세상 떠난 남편이 남긴 마지막 3000만원… 분실 하루 만에 주인 품으로 — 서울신문, 2026년 11월 3일
한 줄 요약: 제주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품 약 상자를 폐기하려던 66세 여성이, 상자 속에 숨겨져 있던 현금 3000만 원을 약국 직원의 신고와 경찰의 추적으로 하루 만에 돌려받았다.
작가의 말
제주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약 상자 안에, 아내도 몰랐던 현금 삼천만 원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남편이 택시 영업을 하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추정된다고 기사는 전했습니다. “아직 세상은 따뜻하다”는 실제로 그분이 하신 말씀이고, 사납금을 채우고 남은 돈을 상자 밑에 모아뒀다는 것, 약을 건네며 그 위를 매일 지나쳤다는 것은 모두 제 상상입니다. 돈을 찾아 다행이라는 결말보다, 그가 왜 끝까지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쪽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