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는 공책 맨 뒷장을 펼쳤다. 거기엔 아무도 모르는 글자들이 있었다. 삐뚤빼뚤한 줄이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몰래 베껴 그린 한글이었다.
여름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이 바람 소리 같았다. 칠판 글씨는 처음 보는 무늬였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라피는 창가에 서서 공을 품에 안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한글날에도 교실은 평소처럼 열려 있었다. 라피가 이 교실에 나온 지는 아직 일주일이었다. 옆자리에는 몇 해 전 먼저 한국에 왔다는 형이 앉아 있었다. 형도 아직 글씨는 자신 없다고 했다. 선생님이 흰 종이를 내밀었다.
“이름이 뭐예요?”
라피는 입으로만 소리를 냈다. 선생님은 그 소리를 한 자씩 받아 적었다. ㄹ, ㅏ, ㅍ, ㅣ. 연필 끝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라피는 자기 이름이 네 조각으로 나뉘는 걸 처음 보았다. 벵골 글자와는 생김새가 달랐다. 소리는 같았다.
선생님이 칠판에 새 문장을 썼다. 같이 놀자. 라피는 그 네 글자를 공책에 베꼈다. 뒷장의 몰래 그린 글자들과 나란히 놓으니, 비뚤었던 선이 조금 곧아져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라피는 공을 꺼내 들었다. 복도 끝, 건물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입속으로 네 글자를 한 번 더 굴렸다. 소리 나는 대로.
문을 밀었다. 가을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길 건너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라피는 공을 고쳐 안고 그쪽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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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엄마 아빠 따라 한국 왔어요”…대학에서 열린 특별한 ‘한글’ 수업 — KBS(진선민 기자), 2026-10-09
한 줄 요약: 올여름 이주노동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열두 살 아이처럼,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중도입국 학생들이 학교 대신 한 학기 동안 매일 한글 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운다.
작가의 말
올여름 이주노동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열두 살 아이가 학교 수업을 “하나도 이해 못 했다”고 말한 것, 그런 아이들이 학교 대신 한 학기 동안 매일 한글 교실에 다니는 것은 기사에 나온 사실입니다. 인물의 이름 ‘라피’, 한글날이라는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둔 것, 공책 뒷장에 몰래 연습해 온 글자들, 이름을 받아 적는 장면, 마지막 공터 장면은 모두 제 상상입니다. 한글을 기념하는 날에도, 그 글자 앞에서 아직 가장 외로운 아이가 어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에 걸려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