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마요와 불고기

그는 낮에 걷지 않는다.

이십칠 년째. 처음엔 무서워서 그랬고, 나중엔 습관이 되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공장으로 간다.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하고, 해가 지고 나서 나온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산다. 참치마요와 불고기. 이십칠 년 동안 메뉴가 바뀌지 않았다.

한국어를 배운 건 그 삼각김밥 덕이었다. 뒷면에 적힌 성분표. 정제수, 정백당, 혼합간장.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매일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뜻은 몰랐다. 소리만 알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리가 쌓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쌓여 대화가 되었다.

공장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은 ‘형’이었다. 본명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장도, 옆 라인 반장도 ‘파키스탄 형’이라고 불렀다. 처음엔 어색했다. 형이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한테 쓰는 것이라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이름이 없어도 가까울 수 있었다.

셋째 딸이 아팠을 때,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보험이 없었다. 보험이 없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수술이 필요했고, 이천만 원이 들었다. 통장에는 이백만 원이 있었다. 그날 밤 공장 바닥에 앉아서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손이 떨려서 라이터를 켤 수 없었을 뿐이다.

센터 소장이 병원을 찾아주었다. 의사가 수술비를 깎아주었다. 딸은 살았다. 그 뒤로 그는 의사의 이름을 수첩 첫 장에 적어두었다. 한국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찾아가면 잡힐 수도 있으니까. 수첩만 열어본다. 가끔.

여름이면 단속반이 온다. 어느 해 여름, 동네 슈퍼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오늘 나오지 마.” 그게 전부였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방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바깥은 삼십오 도였다. 에어컨은 없었다. 선풍기를 틀고 천장을 보았다.

슈퍼 사장은 왜 전화를 했을까. 이십 년 넘게 매일 삼각김밥을 사간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이 나라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증명이었다. 매일 오는 사람. 참치마요와 불고기를 사가는 사람.

딸은 올해 열여섯이 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어를 쓰고, 한국 노래를 듣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의 나라도 모른다. 딸이 물었다. “아빠, 우리 어디 사람이야?” 대답하지 못했다. 모른다고 하면 무책임한 것 같았고,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았다.

대신 삼각김밥을 건넸다. 참치마요. 딸이 받아서 뜯었다. 비닐을 벗기고, 김을 감싸고, 한입 베어 무는. 그 손놀림이 이십칠 년 전의 자기와 똑같았다.

그게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삼각김밥을 뜯을 줄 아는 손. 그것이 그들의 국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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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신분 없는 27년, “매순간 무서웠다”…미등록 이주민의 ‘희망 꺾인 삶’ — 한겨레, 2026년 6월 15일

한 줄 요약: 1999년 한국에 온 미등록 이주민들의 27년 — 신분 없이 일하고, 아이 낳고, 아프고, 단속을 피해 살아온 삶의 기록.


작가의 말

삼십구만 칠천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한국에서 체류 기한을 넘긴 사람들의 수. 그 안에 이십칠 년을 산 사람이 있었다. 낮에 걷지 못하고, 병원에 갈 수 없고, 이름 대신 ‘형’으로 불리는 사람. 그런데 동네 슈퍼 사장이 단속날 전화를 걸어준다는 대목에서 멈추었다. 추방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전화를 거는 일. 법 바깥의 사람에게 법 바깥의 연대가 닿는 순간. 그 전화 한 통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