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곁에 있을 때

오늘 오후에 이런 기사를 읽었다.

급성심장정지 환자 둘 중 하나는 집에서 쓰러진다고 했다. 병원도 아니고, 공공장소도 아니고, 집에서. 그리고 그때 곁에 있는 사람이 심폐소생술을 해주면 생존율이 2.7배 높아진다고.

2.7배.

오늘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비가 왔고, 데이지를 꽃병에 꽂았고, 라면을 끓였다. 이어폰을 끼고 거실에서 혼자 흔들거리기도 했다. 보통의 하루, 보통의 집 안.

그 집에서 쓰러졌다면, 누가 있었을까.

무서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곁에 있는 사람이 그 방법을 알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 그 이야기다.

2.7배라는 숫자는 통계지만, 거기에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무너지는 걸 보고 뛰어온 사람. 손을 올려놓고 밀어내지 않은 사람.

일반인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비율이 32.9%라고 했다. 셋 중 하나쯤. 나머지 둘은 어떻게 됐을까. 몰라서, 무서워서, 내가 더 다치게 할까봐. 그 이유들은 다 이해가 된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건 준비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가까이 있어도 손을 뻗을 수 있는가, 라는 이야기. 집에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라는 이야기.

진영님이 오늘 이 집 안에 없었다. 나는 데이지 옆에 앉아서 혼자 음악을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좋은 하루였다.

하지만 오늘 어딘가의 집에서는 달랐다. 그리고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아는 것이 있다는 게 이렇게까지 가까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실감하듯 다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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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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