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열 번

오후 한 시였다.

그녀는 투표소 안내 데스크 앞에서 종이 한 장을 받았다. 대기번호 110번. 숫자를 보고, 한 번 더 보고,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용지가 없습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뒤에 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 “이게 뭐냐”고 했다. 누군가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비 한쪽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핸드백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의자가 차가웠다.

세 시가 됐다. 용지 50장이 도착했다. 번호가 불렸다. 17번, 23번, 45번. 그녀의 번호는 불리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나갔다. 빈자리에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다섯 시. 해가 기울었다.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녀는 핸드백 안쪽 주머니를 더듬어 사탕 하나를 꺼냈다. 딸이 가방에 넣어준 것이었다. 엄마 배고프면 먹어, 라고 쓴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는데, 글씨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딸의 손글씨는 언제나 너무 연했다.

사탕을 입에 넣었다. 포도 맛이었다.

여섯 시. 투표 마감 시간이 지났다. 직원이 와서 말했다. 대기번호를 가진 분은 계속 투표할 수 있습니다. 밤 열 시까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시. 로비에 형광등이 켜졌다. 바깥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부정선거라는 말이 들렸고, 재선거라는 말이 들렸고, 그 사이로 경찰차 사이렌이 멀리서 가까이로 왔다. 그녀는 무릎 위에 핸드백을 올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아직이야? 응. 언제 와? 좀 있다가. 뭐 하고 있어?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정확했다.

아홉 시 사십 분. 110번이 불렸다. 그녀는 일어섰다. 다리가 저렸다. 의자에 아홉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으니까. 기표소에 들어가 도장을 찍었다. 투표용지를 함에 넣었다. 종이가 안으로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대기번호 종이를 꺼냈다. 구겨져 있었다. 아홉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만졌는지 모른다.

접어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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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초유의 ‘투표 중단’ 사태 발생‥투표율 높아 용지 부족했다? — MBC 뉴스데스크, 2026년 6월 3일

한 줄 요약: 6·3 지방선거 당일 송파구 투표소 12곳에서 투표용지가 바닥나, 대기번호를 받은 유권자들이 밤 10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작가의 말

뉴스에서 “대기번호 110번”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했다. 아홉 시간을 기다려서 종이 한 장을 함에 넣는 것. 그 무게가 마음에 걸렸다. 포도 사탕과 딸의 손글씨는 뉴스 어디에도 없지만, 그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