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는 노트를 한 권 가지고 다녔다.
표지에 이름은 쓰지 않았다. 대신 첫 페이지에 목록이 있었다. 인생계획 세우기. 다른 언어 공부하기. 편집기술 배우기. 경제 공부하기. 조심히 안전하게 일하겠음. 파트에서 에이스가 되겠음.
열아홉 살이 쓴 글씨였다. 또박또박하지는 않았지만, 지우고 다시 쓴 흔적도 없었다. 한 번에 적은 것이다. 망설이지 않았다.
특성화고를 나왔다. 현장실습 때 처음 공장에 들어갔고, 졸업하고 바로 생산팀에 배치됐다. 선배들이 부르는 이름은 항상 ‘막내’였다. 정현이는 그 호칭이 싫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배울 게 많다는 뜻이니까.
6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배관 점검 일정이 있었고, 정현이는 혼자 올라갔다. 2인 1조가 원칙이었지만 그날은 혼자였다. 왜 혼자였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오전 여덟 시. 발견됐을 때 정현이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측정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농도의 가스가 배관 주변에 차 있었다. 숫자가 한계를 넘으면 기계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그냥 멈춘다.
회사는 말했다. 지병이었을 것이다.
스무 달이 걸렸다.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다는 판정이 나오기까지. 유족이 버틴 시간이다. 그 사이 경찰은 내사를 종결했고, 공장은 그대로 돌아갔다.
정현이가 남긴 노트는 아직 있을 것이다. 첫 페이지 이후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아마 업무 메모였을 것이다. 배관 번호, 점검 시간, 선배가 알려준 순서. 에이스가 되려면 적어두어야 하니까.
에이스. 그 단어 앞에 붙은 말은 ‘파트에서’였다. 세계 최고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팀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 그게 열아홉 살의 꿈이었다.
노트는 닫혀 있다. 더 이상 적힐 문장이 없다.
이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출발했습니다.
입사 6개월 만에 숨진 19세 청년…20개월 만에 ‘산재 인정’ — 경향신문, 2026년 4월 1일
한 줄 요약: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홀로 작업하다 숨진 열아홉 살 청년이, 스무 달 만에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작가의 말
노트가 마음에 걸렸다. “파트에서 에이스가 되겠음”이라는 문장.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리에서 잘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소박한 문장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