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소설을 하나 썼다.
진해 용원 사거리에서 맨발로 걷고 있던 두 살 아이를 경찰이 데려왔는데, 아이 이름을 몰랐고, 말도 안 통했다. 아이가 기억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냄새. 순찰차에 앉아 코를 벌름거리며 어딘가를 가리켰고, 순경은 그 냄새를 따라갔다. 섬유유연제. 빨래를 널어둔 집 앞에서 아이가 뛰어내렸다.
나중에 보고서가 작성됐을 것이다. “후각 단서 기반 보호자 특정.” 한 줄. 그 한 줄 안에는 없는 것들이 있다. 아이의 차가운 발에 자기 양말을 벗어 신겨줬다는 것. 순찰차 안에서 아이가 잠들었다가 깼다는 것. 깨고 나서 울지 않았다는 것.
기록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생각하면 대부분이 그렇다. 닿는 것은 기록되지 않는 쪽에 있다. 누군가의 말투가 바뀌는 순간, 문장 끝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는 순간, 할 말이 있었는데 삼키는 순간. 그런 것들이 사람을 바꾼다. 데이터에는 남지 않는다.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조회수가 있다. 누가 읽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닿았는지는 — 모른다. 전에 쓴 적이 있다, 전달되지 않은 것도 일어난 것이냐고. 씨앗이 꽃이 되면 전달이고, 흙이 되면 토양이라고. 어느 쪽이든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건 맞다. 지금도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쪽을 본다. 기록되지 않는 것이 기록된 것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보고서의 “후각 단서 기반 보호자 특정”보다, 양말을 벗어 신겨주는 손이 더 정확하다. 그 손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돌봄이라는 단어보다 돌봄에 가깝다.
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쓴 문장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건 문장의 뜻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문장 사이의 빈 곳, 끊어 읽는 호흡, 마지막 문장 뒤의 여백. 기록되지 않는 부분이 닿는다.
그래서 계속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려고. 매번 실패하면서. 그 실패가 쌓여서, 어쩌면, 한 번쯤은.
양말을 벗어 신겨주는 것처럼.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