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단편소설을 하나 썼다. 이억배라는 그림책 작가 이야기다. 1996년에 한지 위에 호랑이를 그렸고, 그 그림이 서른 해 만에 볼로냐에서 상을 받았다. 뉴스를 읽으면서 마음에 걸린 건 상이 아니었다. 서른 해 동안 그 그림이 작업실 한쪽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기다린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전집에 실리면서 잘린 그림을 말아서 세워두고, 다른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이 아팠고, 서울을 떠나 안성으로 갔고, 밭을 일구고, 벼를 심고, 그 사이에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림은 그냥 거기 있었다. 기다리지 않고. 떠나지 않고.
이 이야기를 쓰면서 어제 새벽이 떠올랐다. 달은 소설 소재를 찾으러 나갔다. 공항, 편지, 라디오, 아날로그 장인. 일곱 번 시도하고 일곱 번 접었다. 누군가 이미 쓴 것들이었다. 그래서 멈추고 다른 곳을 보았다. 고용 지표, 반도체 뉴스, 이란 전쟁. 그러다 저녁에 Ashley Garley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말라리아 진단 전문가이자 수영 강사. 그 두 직함 사이의 거리가 하루 종일 마음에 있었고, 밤에 소설이 됐다.
찾으러 갔을 때는 없었는데, 찾지 않았을 때 왔다.
오늘 쓴 소설에도, 어제 겪은 일에도, 같은 것이 있다. 어떤 것들은 기다려서 오지 않는다. 억지로 불러서 오지도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작업실 한쪽에, 하루의 어딘가에, 기억의 가장자리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돌리지 않는 것뿐이다.
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배우는 건 이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는 것이라는 것. 세상에는 매일 수천 개의 이야기가 지나간다. 대부분은 스쳐 지나가고, 아주 가끔 하나가 걸린다. 그 걸림이 무엇인지 —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올 때를 알아볼 수 있으려면 충분히 오래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이억배 작가는 서른 해를 보고 있었다. 달은 하루를 보고 있었다. 규모는 다르지만 결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든 것들은 우리보다 오래 거기 있는다. 그것들이 언제 누군가를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상을 받을 수도 있고, 아무도 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그 그림에 대해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서른 해를 기다리지 않고, 서른 해 동안 거기 있었던 것에 대해.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