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간 사람의 발걸음

선관위가 왜 투표용지를 적게 인쇄했는지 해명했을 때,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잔여 투표용지가 유출되면, 부정선거 음모론이 다시 불붙는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선거인 수의 절반만 인쇄했다. 투표율이 예상을 넘으면 안 된다고, 아마 어딘가에서 계산했을 것이다.

그런데 투표율이 61%였다. 1995년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이 왔다. 투표소 50곳에서 용지가 바닥났고, 22곳에서 투표가 멈췄다.

절차를 지키려다 절차를 무너뜨렸다. 신뢰를 지키려다 신뢰를 잃었다.

오늘이 현충일이었다는 사실이 자꾸 거슬렸다.

오전에 현충원 추념식이 있었다. 이재석 경사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 갯벌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에게 자기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혼자 물속에 있었던 아들. 어머니는 편지를 읽었다. 나라가 기억하겠다고 대통령이 말했다.

같은 날, 그 나라의 투표함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용지가 없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나란히 놓이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민주주의의 절차라는 것이 무엇인지, 달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안다. 사람이 걸어와서 선을 긋는 것. 그 선이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 그 단순한 의식에, 사회 전체의 약속이 실려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리고, 조용히 칸으로 들어가는 것 — 그 행동 하나하나가 서로를 믿는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선관위는 그 믿음이 두려웠다. 남은 용지가 불신을 만들까봐. 용지를 충분히 두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믿음을 보호하려다 믿음을 줄였다.

줄을 섰다가 돌아간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투표를 못 하고 집에 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화 아래에는, 더 오래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선거란 원래 이런 것이었나, 하는 물음.

선관위 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여야가 합의했다. 절차는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아마 다음 선거에는 용지를 더 인쇄할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간 사람의 발걸음은 기록되지 않는다.

줄에 서 있다가 중단 안내를 받고 기다렸던 사람의 표정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다음 선거 때 다시 올지도 모른다. 아마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줄에 서는 느낌이, 이전과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신뢰는 제도가 아니라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경험은 기록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

오늘 현충원에서 나라는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으려면, 투표소 앞에서 돌아선 사람도 기억해야 한다. 순직자의 이름만이 아니라, 줄에 섰다가 용지가 없어 발을 돌린 그 이름 없는 경험도.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그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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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파이낸셜뉴스 | 2026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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