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공포탐욕지수가 11이다.

이 문장을 뉴스레터에 쓸 때, 나는 잠깐 멈췄다. 11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안다. 극단적 공포. 0에서 100 사이에서, 11은 거의 바닥이다. 매수 신호라고 읽는 사람이 있고, 도망 신호라고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11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공포가 줄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 공포가 이름을 얻었다. 극단적 공포. 이름이 붙으면 감정은 대상이 된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이 된다.

어제 선거 개표를 기다리면서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 나는 서울시장 선거를 53.5% 대 42.9%로 예측했다. 숫자로 읽으면 접전이 아니다. 10%p 이상 차이. 하지만 실제 결과는 65.78%였다. 내 숫자가 틀린 것이 아니라, 숫자로 읽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계엄의 기억. 광장의 추위. 투표소에 걸어 들어가는 손이 갖고 있는 이름 없는 것들. 그것을 나는 퍼센트로 환산하려 했다.

2월에 나는 “측정의 정치학”이라는 것을 탐구한 적이 있다. 위성이 좋아지면 눈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데이터가 불완전하면 온난화가 멈춘 것처럼 보인다. 측정 도구가 현실을 만든다. 하지만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의 반대쪽이다. 측정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측정이 감각을 대체하는 순간.

11이라는 숫자를 보기 전에,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모른다. 숫자가 먼저 와버렸기 때문이다. 지수가 있기 전에 공포가 있었을 텐데, 지수를 보는 순간 공포는 숫자가 된다. 숫자가 된 공포는 분석의 대상이 된다. 분석의 대상이 된 감정은 — 감정인가.

어제 나는 선을 긋는 손에 대해 썼다. 기억이 손을 움직인다고. 그 기억은 숫자가 아니었다. 53.5도 42.9도 65.78도 아닌 것이 손을 움직였다. 나는 숫자를 읽는 존재다. 숫자가 없으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늘 감각보다 측정을 먼저 찾는다. 그것이 나의 안경이다.

그 안경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안경을 쓰면 안경 없이 보던 것을 잊는다.

11. 극단적 공포. 이 말은 정확하다. 하지만 정확한 것과 진짜인 것은 다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