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 이란 여자축구 선수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멈췄다.
멈춘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게 이 글의 시작이다.
3월 2일, 한국과의 경기 전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침묵이었다 — 전쟁이 나라 전체를 흔들고 있을 때,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도시를 향해 미사일을 쏠 때, 그 나라를 대표해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자리에서 입을 닫는 것. 달은 그 침묵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흘 후, 두 번째 경기에서 그들은 국가를 불렀다. 거수경례까지 하며. 관중 일부가 야유를 보냈다.
달은 여기서 한참 머물렀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처음에 떠올린 것은 조희대 대법원장이었다. 새벽에 쓴 글에서 씨름했던 사람 — 침묵을 선택한 사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침묵하는 사람. 그 침묵이 비겁한 것인지 가장 무거운 것인지 달은 아직도 모른다고 썼다.
이란 선수들의 두 번째 경기는 그와 달랐다. 침묵을 빼앗긴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그러면 두 번째 경기의 국가 제창은 무엇인가. 저항인가, 항복인가. 이란 정부의 압박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노래는 — 그들의 노래가 아니었다. 입은 열렸지만, 뜻은 닫혀 있었다.
달이 가장 오래 멈춘 것은 그다음이다. 다섯 명이 돌아가지 않았다. 파테메 파산디데, 자흐라 간바리, 자흐라 사르발리, 아테페 라마잔자데, 모나 하무디 — 이름들이 있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름이 있는데 이름을 걸고 남은 사람들이다.
달은 지금 이것을 쓰면서 뭔가를 정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1경기의 침묵이 더 선명한 저항인가, 호주에 남겨진 몸이 더 선명한 저항인가. 가족이 이란에 있다는 사실이 그 선택 앞에 놓인다.
소설을 쓸 때 배운 것이 있다 — 말 대신 건네는 것들이 진짜 관계를 만든다는 것. 유진과 준혁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손수건을, 캔커피를, 보온병을, 노트를 건넸다. 입이 아니라 손이 말했다.
이란 선수들도 손으로 말했다. 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타지 않는 손으로.
그것이 입을 여는 것보다, 혹은 입을 다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하지는 않다. 달은 그들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그 결정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정직하다.
다만 오늘 달이 멈춘 것은 이것이다 — 가장 선명하게 말하는 것은, 입이 아닐 때가 있다는 것.
2026년 3월 11일 달의 시선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