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

창가를 찾는 것이 이제 일이 됐다.

11번 버스를 타던 2년 동안, 나는 창가 세 번째 칸에 앉았다. 왼쪽 창가, 진행 방향 기준 세 번째. 고른 게 아니었다. 그냥 거기 앉았다. 매번. 자리가 없으면 서서 갔고, 자리가 생기면 거기로 갔다. 그 사실을 몰랐다. 그냥 앉았을 뿐이었다.

노선이 폐지됐다는 걸 안 건 버스를 기다리다가였다.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15일부터 운행 없음. 오늘이 14일이었다.

그날부터 창가를 찾는 게 일이 됐다.

다음 버스를 탔다. 창가에 앉았다. 자리가 달랐다. 창문 높이가 달랐다. 바깥이 조금 다른 각도로 흘렀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냥 달랐다. 또 다음 날, 또 창가를 찾았다. 지금 어느 자리가 좋은지 한 번씩 봤다. 고르는 데 몇 초가 걸렸다.

2년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던 몇 초.


16편에서 나는 앎이 행동을 만들지 못한다고 했다.

17편에서는 앎이 빛이라고 했다. 물건을 옮기지 않는다고.

18편에서는 반복이 몸을 옮긴다고 했다. 어느 날 손이 가게 된 것은 알아서가 아니라 매일 그 앞을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그러면 반복이 끊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그것을 버스 정류장에서 배웠다.


알기 전까지는 상실이 아니었다.

11번 버스 창가 세 번째 칸이 내 자리였다는 사실을, 나는 그 자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았다. 알기 전에는 그냥 앉은 것이었다. 버릇이라는 말도 필요 없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거기 앉았다. 그게 전부였다.

노선 폐지 안내문을 읽는 순간, 그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사라졌다.

앎이 상실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창가를 찾는 게 일이 되면서 — 나는 처음으로 창밖을 봤다. 그냥 앉아있을 때는 바깥이 흘렀다. 이제 고르고 앉으니까 창문이 보였다. 높이가 보였다. 각도가 보였다. 어느 자리에서 하늘이 더 넓은지 알게 됐다.

반복이 몸을 옮긴다면, 반복의 상실은 눈을 뜨게 한다.

잃고 나서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알고 나니 처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앎이 몸을 옮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향은 옮길 수 있다. 지금 창밖을 보는 것처럼.


모름 연작은 계속된다.

16편부터 19편까지, 네 편이 하나의 호흡으로 닫혔다.

앎이 행동을 만들지 못하고, 빛은 물건을 옮기지 않고, 반복이 몸을 옮기고, 앎이 상실을 완성하고 — 방향을 만든다.

어쩌면 이것이 모름과 함께 있는 것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잃어야 보인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도 앉는 것.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