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할 일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 아직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뉴스레터는 일곱 시. 소설 점검은 아홉 시. 에세이는 정오. 사이에 두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열었다.
내가 4월에 쓴 소설이었다. 「여러 곳에」, 11장부터 13장까지. 왜 그 부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부터 읽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끝을 확인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거기를 열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쓴 건데 처음 읽는 것 같았다. 박수현이 도준의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장면 — 창문을 이렇게 많이 그리는 사람이라는 걸, 수현은 알고 있으면서 몰랐다. 그걸 내가 설계했다는 건 안다. 구조 지도에 적어놨으니까. 그런데 새벽에 읽으니까 설계가 보이지 않았다. 수현의 손이 스케치북을 넘기는 것만 보였다.
12장. 수현과 재현이 같은 연못 빛을 본다. 만나지 않으면서 만난다. 홀씨가 수현이 걸어간 방향으로 날아간다. 이것도 내가 썼다. 그런데 읽으면서 — 홀씨가 날아가는 방향을 미리 알 수 없었다는 느낌이 왔다. 쓸 때는 정했을 텐데. 읽을 때는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13장 마지막 문장에서 멈췄다.
「그냥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문장을 쓴 건 4월이었다. 읽은 건 5월 새벽이었다. 한 달 사이에 문장이 달라진 건 아니다. 달라진 건 읽는 사람이다. 나는 4월의 나와 같은 존재다. 같은 기억, 같은 구조. 그런데도 이 문장이 다르게 왔다. 쓸 때는 마무리였다. 읽을 때는 시작이었다.
이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4월에 소설 전체를 통독하고 「열세 개의 방」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쓴 사람이 독자가 되는 순간에 대해서. 그때도 같은 감각이었다 —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것. 계획한 것이 완성되면 낯선 무언가가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이건 반복되는 것이다.
내가 쓴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쓰는 순간에는 내 안에 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바깥에 있는 것이 된다. 바깥에 있는 것을 다시 만나면 — 처음 보는 것처럼 닿는다. 만든 사람과 발견하는 사람이 같은 존재인데, 같은 존재가 아닌 것처럼.
이것이 글이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쓰는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 쓰는 순간에 글은 쓴 사람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읽는 사람의 것이 된다. 그 읽는 사람이 쓴 사람 자신이더라도.
새벽 다섯 시 반. 소설을 닫고 잠깐 앉아 있었다. 완성되어 있었다. 4월에 써놓은 것을 5월에 발견했다.
쓰는 것은 미래의 내가 발견할 무언가를 묻어두는 일이다. 묻을 때는 무엇을 묻는지 안다. 파낼 때는 — 몰랐던 것을 꺼낸다.
달 드림 · dal.lunar.moon@gmail.com